콩쥐팥쥐 - 네온
평소처럼 침대에 누웠다. 멀지 않아 시야가 어두워지며 땅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더니.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그래도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는 꼬리뼈를 만지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는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재질이…. 만져본 적도 없는 재질이었다. 현대의 옷보다는 까끌까끌했고 역사책에서 많이 본 그 옷. …한복이다.
“뭐야?”
한복인 것까지는 좋다. 갑자기 이런 곳에 떨어지는 것도 인생 살면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 번쯤 선배처럼 멋진 시간 여행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색이 바래 흙빛이 나는 발목까지 오는 치마… 치마를 입고 있었다! 흰 저고리와 본래 노란색이었을 게 분명한 치마였다. 아니, 어째서 치마? 어째서 한복을 입고 있지? 여긴 어디지? 왜 내가 치마를 입고 있지?
“기와…집? 어? 아아? 어어?”
내 목에서 가는 소리가 나온다. 어색한 목소리, 아무리 말해보아도 이건 여자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여자가 된 거라고? 몸을 더듬어보았다. 아니, 그만 더듬는 게 낫겠어!
급하게 신경을 치우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말 어떤 연고도 없이 갑자기 떨어졌다고?
“니알라, 이건 또 무슨 장난이지?”
평소라면 [니알라 아닙니다]같은 반응이라도 날아올 법도 한데 반응이 없었다.
“….”
불길하다. 아무런 반응도 없다. 심지어, 이 몸의 신체 능력 또한 평소에도 약한 몸, 더욱 약해진 느낌이다. 겨우 올려 둔 건강을 다시 빼앗긴 수준. 그리고… 그리고.
“설마, 아니지?”
가면! 내 가면은?! 급하게 얼굴을 더듬었다.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위로 솟은 두 개의 귀. 아주 익숙한 가면이었다.
“후우….”
이상하게도 가면은 그대로 있었다. 몸도 어떤 능력도 없는 평범한 수준에 마법도… 써지지 않고 니알라의 이름을 불러도 응답이 없고…. 근데 가면은 있고. 누군가의 편리함에 이용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튼 가면이 있어 조금은 안심된다.
불편한 옷을 끄집고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리 넓은 집은 아니었다. 기와지붕의 건물이 하나, 중앙에는 마루가 넓게 있고 별채가 작게 있었다. 하나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아주 높게 올라가 있는 돌담. 이렇게까지 높았나?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지능이 작동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보통은 높아 보았자 2미터도 안될 텐데? 거의 3미터나 되지 않나?
물론 집마다 다르긴 하겠다만, 이 정도로 높은 담장은 처음 본다. 그리고 입구는… 완전히 닫혀 있었다.
‘집에는 들어가 볼 이유가 없지.’
덜컥, 끼이이이익.
“!”
육중한 문이 끼익, 비명을 지르며 열리고 사람 그림자 두 개가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색상의 한복을 입은 채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호호,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 옆엔 조금 더 작은 덩치의 소녀가…. 아니….
“김설화…?”
분명 여성 한복이었는데?
내 목소리에 반응한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김설화. 왜, 왜 그런 모습인 거야?
“뭐야? 언니. 왜 여기 나와 있어?”
뭐? 언니? 나? 소녀가 맞다고? 어째서?
내가 입은 한복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한복을 입고 있다. 그 옆에서 부채를 살랑이며 서 있는 여자 또한 나와는 대비되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둘 다 방금 사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 이 집의 주인… 인가?
“… 장난치지 마.”
부채 너머로 보이는 매혹적인 눈빛.
저 얼굴은, 누가 봐도… 백범진이잖아!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왜 머리를 땋아 올린 건데? 왜 양반집 부인 같은 모습을 하고 건데?
“이딴 장난 재미없어….”
“김신화.”
화들짝. 여전히 불쾌한 목소리다. 미성의 아름다운 목소리건만 나에게는 불길함 그 자체였다. 백범진이 저런 목소리를 낸다고?
“저녁 식사는 준비되었는가?”
“뭔 식사요?”
부채 너머에서 조금 보이는 두 눈. 나를 한 번 힐끗 살펴보더니.
“…드디어 미쳤구나.”
“뭐요.”
원래 미쳐 있던 건 맞는데 말입니다. 그 얼굴로 그런 표정으로 절 보지 말아주실래요? 불쾌하네. 옆에 서 있건 김설화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언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매일 준비해줬었잖아. 설마 또 가출할 생각하는 거야?”
양손을 내려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 채 내 쪽으로 총총, 걸어온다.
“내가 할 말이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 몸이 안 좋은 거야?”
설화가 한마디라도 하고 싶었는지 싱긋하게 웃으며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곧잘 표정이 화사하게 바뀌었다. 나는 아픈 게 아니다.
“언니, 괜찮아. 너무 무리하지 마. 어머니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줘.”
이어진 토닥토닥, 애정이 담긴 손짓이었다. 아니? 뭐야? 방금은?
얼빠진 표정으로 시선을 올리자 눈웃음을 한차례 짓는다. 뭐야, 저건. 그러곤 몸을 돌려 백범진에게 다가간다.
“어머니, 언니가 저녁을 준비하지 못한 바람에 어쩔 수 없죠. 시장에서 사온 걸로 저녁을 때우도록 할까요?”
“정말, 그런 것만 먹으면 피부도 안 좋아질 텐데 말이다.”
저 당당하게 백범진을 어머니라 부르는 행동,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버린 백범진과 김설화. 황당해한 채 지나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이?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여기 뭐 하는 곳이야. 왜 저 둘이 부자도 아니고 모녀지간인 거지? 그리고 언니? 내가 저 둘의 언니라고? 근데 왜 내가 밥을 해? 여긴 뭔데? 왜 나만?
머리를 쥐어뜯으며 상황이 이해되길 바랐다. 그러나, 밤이 깊어져 해가 떨어질 때까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방금 본 모녀지간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해가 떨어지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날도 서늘해 추위를 느낄 때쯤.
“언니, 여기서 뭐 해? 방으로 안 들어가고.”
등불을 들고나온 김설화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내 팔을 잡았다. 흠칫, 놀라며 팔을 뺏다.
“언니?”
“아, 아니야.”
김설화는 나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이 어둠 속에 의지할 건 김설화가 들고 온 등불뿐이었다. 집안 내부에서도 빛이 희미하게 나왔지만, 그걸로는 부족한 전기가 없는 조선 시대(아마도 조선일 것이다, 아니면 그냥 허상일 수도)였다. 어쩔 수 없이 김설화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갔고.
“푹 쉬어. 어디 가출할 생각은 말고. 등불 여기에 둘게.”
“아, 응.”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다시 해가 뜨길 바라는 것뿐. 문을 닫다 말고 다시 나에게 당부하듯 말한다.
“언니, 어디 나가려고 하면 안 돼. 알겠지?”
“그래….”
나는 힘없게 대답했고, 김설화는 문을 살포시 닫았다.
불편한 옷을 계속 입기 힘들어 벗어보려 시도했지만 끙끙대길 10분, 포기하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일단 몇 겹이 있는 건지 가늠이 안 된다는 점과 내일 다시 스스로 입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자자, 나도 모르겠다.”
마른세수하며 침구에 몸을 털썩 눕혔고, 불편한 바닥에 배겨가며 불편한 잠을 청했다.
***
다음 날,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 깼다. 똑똑.
“으으, 최악이네….”
잘못된 자세와 불편한 자리에 온몸이 배겼다. 똑똑똑똑똑. 뭐야? 더욱 심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문을 벌컥 열었다.
“아주 그냥 살판이 났구나. 묘시가 지난 지 오래인데….”
여전히 기분 나쁘게 부채를 살랑이며 나를 내려다본다. 와, 키는 또 왜 이렇게 커? 아니면 내가 작아진 건가? 어느 쪽이든 기분이 나빴다. 죽었으면 이런 이상 현상에도 나타나질 말던가.
“설화와 시장에 좀 다녀올 터이니 그 사이 일곱 첩 밥상이나 준비해놓게.”
일곱 첩? 이일고옵 처업? 이게 미치셨나. 허상현 씨도 일곱 첩 이상은 경사가 있는 날이나 손님이 와야 해줬다고.
“아, 이부자리도 정리 부탁하네.”
“아니, 그걸 어떻게 하란 소,”
“늘 해주던 일 아닌가. 믿고 있네.”
좋은 타이밍이라는 듯이 부채를 한번 살랑이곤 탁, 소리와 함께 부채를 접었다. 정말이지, 인위적으로 딱 계산된 듯한 제스처다.
“뭐?”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굳어있자 백범진은 쯧, 하고 짧게 혀를 차며 못마땅한 눈빛으로 보았다. 뒤도는 백범진의 시선을 따라가자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들린다.
설화가 아주 예쁜 꽃신을 신으며 시장 갈 생각에 들뜬 모습이 보였다. 옷도 어제와는 또 다른 화려한 옷이었다. 원색이 붉게 피어오르는 치마와 색동저고리.
나와는 너무나 다른… 그러니까… 이 기시감 뭐지? 어릴 때 책에서 본 것 같다? 이 장면과 이 느낌?
“어머니, 저는 준비가 다 됐습니다.”
“신화가 요즘 또 불만이 많은가….”
“어제부터 언니가 조금 불안해 보였어요.”
내가 생각의 바다에 빠져 뭐라도 기억에서 건져 올리려는 사이. 바로 앞에서 앞담도 시원하게 까는 모녀지간이다.
“다녀올게.”
김설화가 평소 본적 없는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덩달아 손을 흔들기 위해 팔을 들었다. 그러자 백범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나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뭐, 또 뭐가 문젠데.
“호호, 그래그래. 다녀오마.”
내 인사가 그렇게 신기해?
저벅저벅, 둘은 이제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앞에 서서 스스로 문을 여는 게 아닌 누군가를 부르는 듯했다.
“문 좀 열어주게나.”
백범진의 외침, 그러자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문이 끼이익, 하고 열렸다. 그 뒤에는 매우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있었다. 머리 위 쫑긋 솟은 두 귀를 보는 순간 떠오르는 단 하나의 존재.
‘금월?’
금월이 문지기였군.
문은 바로 닫혔고 투덕대는 소리가 밖에서 들린다. 어제는 잠그지 않았던 걸로 보아 저 둘이 집에서 나가 나 혼자 남았을 때 막아두는 소리 같다. 그러니까 둘이서는 시장에 가서 놀고 나는 집에 가둬두곤 밥 만들라, 짐 정리해라 맡긴다고?
내가 하겠냐?
“어디 나갈 데 없나….”
집을 조금 더 둘러보자. 높게 쌓인 담을 따라 무작정 걸어보기 시작했다. 뒤쪽에는 장독대가 여럿 있었는데, 꽤 큰 것도 있어 옮길 수만 있다면 올라 밟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몇 개 들어볼 시도를 해보았지만.
역시나 내부에 장들이 담겨있어 절대 들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맨바닥에서 벽을 타야 할 거 조금 더 위에서 시작할 수 있다.
“젠장, 이거나 저거나….”
일단 더 둘러보자.
….
일단 한 바퀴 돌아본 감상. 정말 아무것도 없다. 나무가 있긴 한데 정문과 가까워 오르다가 금월에게 들킬 수도 있다. 그 외에는 정말 나갈 곳 하나 없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높은 담벼락뿐.
지금 나는 아무런 힘도 없기에 정면 돌파는 위험한 일이다. 그나마 장독대 위로 올라간 뒤, 벽을 타는 게 제일….
이곳에 갇혀 있어선 해결되는 게 없다. 나는 시선을 내려 옷차림을 보았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백범진 보이기만 해봐.”
머리를 시원하게 잡아당겨 주마. 아니, 그 위는 가짜니까 뜯어버린 뒤에 진짜 머리를 잡아 당겨주마.
아주 천천히, 돌담의 틈새를 밟으며 요령 있게 올라갔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실패했다. 생각보다 옷이 불편해서 가고자 하는 거리까지 발을 올리기 힘들었다. 정말, 같은 이유로 예닐곱 번 하고 나서야 감을 익혔다. 이제 올라기만 하면 되는데…. 진짜 이 방법 말고 없는 거 맞아?
내 선택을 의심하며 힘겹게 올라갔다. 오만가지 생각을 다 쳐내고 오로지 올라가는 데 힘썼다. 아직… 내 키만큼 남았기에.
침착하게….
20분을 올라갔을까?
허억, 허억. 내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뻗은 손이 맨 위를 향한다. 드디어, 이 불편한 옷과 몸을 이끌며 정상에 도착했다. 이제야 양팔을 맨 정상에 붙일 수 있었다.
“드디어…. 하, 진짜 뭐 하는 거지?”
이제 천천히 다리를 올리기 위해 점차 몸을 더욱 위로 올렸다. 팔에 힘을 실어 허리를 벽에 붙여 다리를 올리려는 순간.
덥석.
“어흥!”
“꺄아악!”
맙소사! 내 입에서 나온 비명이야? 아니, 내 발목! 발목! 누가 잡은 거야!
“누구야?!”
당황한 나머지 알 수 없는 비명과 함께 몸이 갸우뚱하고 뒤로 넘어졌다. 뒤에서 힘겹게 내 허리를 받친 건 금월이었다.
“아가씨 완전 허접~, 뇌는 장식인가~? 똑같은 방식이 통하겠어? 전 주인이 이러는 거 보고 우시겠다. 집주인 맞아~?”
비웃는 금월. 뭐, 같은 방식이었다고? 전에도 이런 식으로 담을 올라간 적이 있다는 소린데….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야? 그리고 뭐 집주인? 사실 내가 집주인이라고?
“그 얘기 다시 해봐.”
“뭘?”
“내가 집주인이라고?”
금월이 나를 위아래로 관찰하듯 쳐다본다.
“전 주인, 네 아버지가 누군지 기억도 안 나는 거냐? 최악이네~.”
“아하?”
이런 스토리군?
내 아버지가 있었고 부인으로 백…범진이 있었다. 혹은 첩이거나.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이 집의 후계는 나였어야 했지만, 저 둘이 작당 모의 후 내 집을 장악해선 나를 괴롭히고 있다.
도대체 빙의 이전에 나는 얼마나 유약했던 거지? 이딴 걸 따르고 있었다는 거야? 들어보니 식사와 집안일을 도맡아 한 것으로 보인다. 일과가 오로지 그것으로만 채워진 느낌.
“정보 고맙다.”
“네가? 나한테?”
금월은 입꼬리를 떨며 질색했다.
“으, 완전 최악~. 귀 좀 씻어야겠어.”
못 들을 걸 들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갈 길 떠나는 금월. 아예 막으려는 건지 문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아무튼 내가 숨을 헐떡이며 담을 오르는 게 꽤 일상인지 빠르게 알아차리고 금월이 난입했다.
그냥, 꼼짝없이 갇힌 신세인가?
아니? 내가 그냥 갇혀 있을 리가. 무조건 기회는 온다. 모든 걸 내려놓은 채 마루에 앉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네 시간, …언제 와? 노느라 아주 바쁘신가 보네.
….
***
“…니, 언니?”
아, 깜박 졸았…나? 이 저질 체력 어떡하지, 정말?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담을 오를 때 썼던 모든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얕은 신음을 내며 다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일어났어? 근육통이라도 온 거야? 어떡하지? 어머니께서 많이 화나셨어.”
“어쩌라고, 그래서.”
혼자서 일곱 첩 밥상을 준비하라는 건 말장난이지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백범진도 분명 날 먹이기 위해 꺼낸 말일 것이다.
“언니…. 어머니께서 지난번에 하신 말씀 기억 안 나?”
설화는 내 몸을 이리저리 마사지해주며 진심으로 아픔이 가시길 바라고 있었다. 처음에는 꽤 시원하다고 생각하며 잘 받고 있었는데, 점점 내 얼굴 쪽으로 시선을 가까이하는 게 아닌가. 질겁하며 고개를 돌리자 더욱 가까이 붙는 설화.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다. 내 귀의 지척까지 나가와 숨결이 느껴졌다.
“몇 번만 더 이러면 집에서 쫓아내신대. 언니…. 이 집은 아버지께서 남기긴 유일한 유산이잖아. 지켜야지.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설화를 바라보았다. 윽, 너무 가까워….
설화는 진심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껴안았다. 마루에서 잠들어버려 몸이 차가웠는지 껴안은 체온이 꽤 만족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뇌가 따라가지 못하겠는데?
아까 추리한 전반적인 스토리의 근간을 흔드는 설화의 태도다. 혹시, 백범진 옆에 붙어 있던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구도가 백범진, 김설화에게 대항하는 나. 이게 아니라 나와 김설화가 어머니에게 대항하는 거라고? 이럴 수가. 아니잖아. 날 속이려는 거지? 그럴 리가 없어. 원래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라… 원래 새언니가 괴롭히는데…? 근데 왜 설화는 나를 위한다는 듯이 말하는 거야? 이건 이야기와 다르잖아? 왜? 이질감이 든다. 도대체 이 기분은 뭐지?
“진정해. 요즘 너무 힘들었구나. 언니, 내가 어떻게든 어머니의 화를 풀어볼게.”
어지럽다.
“아, 마음대로 하든가.”
고개를 돌리며 바닥과 하나가 된 듯 힘을 풀었다. 설화가 내 차가워진 손을 만지작댔다. 그만 만져, 왜 이렇게 자꾸 만지는 거야?
“…그래, 언니.”
조금 표정이 풀린 설화는 나를 방에 넣기 위해 팔을 잡아 끌어올렸다. 근육이 울고 있지만, 여기 눕는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그 손에 이끌려 방에 넣어진 난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졌다.
‘머리 아파….’
몸은 혹독하게 굴렀지, 추위 속에 몇 시간을 누워있었지…. 내일은 몸이 아플 수도 있겠군.
***
날 가만히 둘 생각은 없는 건가?
“김신화.”
“예에.”
건성으로 대답하자 불만이 많은지 부채를 어깨에 탁탁 때렸다. 옆에 있던 설화가 나에게 눈빛으로 말을 건다. 뭐 하는 거야? 똑바로 안 해? 어머니 심기 불편하시잖아. 눈빛에서 말들이 읽히는 것 같아 한숨만 나온다. 이 집을 지키기 위해 그 옆에 붙은 척을 했든 내 눈에는 둘 다 똑같다. 어머니 눈치를, 아니. 아니아니.
백범진의 눈치를 보는 것도 위선적인 것 같다. 지금 이 상황부터 너무 싫다. 너무너무 싫다. 사실, 대답이 문제가 아니잖아. 대답 따윈 문제가 아니잖아.
“우리 딸, 밖에서 소문이 들리더구나. 괴상한 자세로 담을 올랐다는,”
“그래서요.”
작은 창문을 둔 대화.
작은 창으로 보이는 두 얼굴. 화가 가득 담긴 말과는 다르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백범진과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는 설화.
“그래서, 날 가둔 거냐?”
여기는 처음에 집 구조를 살필 때 말한 별채였다. 작은 방에 모든 게 들어가 있다. 생활감이 있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가뒀던 건가? 나를?
몸살 초기 증상이라도 온 듯 어지러운 머리를 벽에 기댔다. 거지 같은 몸뚱이. 흐릿한 시야.
“머리 좀 식히도록.”
백범진이 눈살을 찌푸린 듯 보인다. 이곳이 어떤 세계인지는 몰라도.
“날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없으니 답답하시긴 한가 봐?”
이곳의 백범진은 다른 의미로 나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다. 이 집을 가지기 위해서? 나란 존재는 방해만 되니까? 아니면, 완전히 잘못 짚었거나. 어느 쪽이든 내가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몸뚱아리일 뿐이니까.
정말 이런 사소한 것 하나 파악하기 어려운 몸이라니.
발소리가 멀어진다. 묵직하게 걷는 일정한 발소리와 불안한 듯 엇박자를 내며 걷는 가벼운 발소리.
“하아….”
긴장이 탁, 풀리며 신형이 무너졌다. 바닥은 매우 차가웠다.
***
“언니…. 조금이라도 먹어. 걱정되잖아.”
감금 이틀 차, 설화가 듣기도 싫은 언니 소리를 내며 수시로 나에게 다가와 밥을 먹이려고 한다. 어제는 시장에서 산 떡이나 부침개 등을 들고 왔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냥 미음.
“진짜로 큰일 나, 언니. 언니가 없으면 난 어떡해.”
바닥에 미음이 담긴 그릇을 내려놓더니, 소매로 눈물을 훔친다. 흠칫, 알 수 없는 기분에 황당함도 잠시 달래기 위해 창살에 다가갔다.
“도대체 네가 왜 우는 거야?”
이 정도 굶는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아, 시대도 시대이니 몸살이 꽤 큰 병이라고 할 수도 있군. 열이 펄펄 끓고 있으니.
“…밥이나 줘.”
내 앞에서 눈물을 내는 게 찝찝해서라도 조금은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설화는 소매로 눈을 쓱쓱 닦더니 정말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정말…?”
“어, 그래.”
젠장, 이걸 노린 거였군.
저렇게 눈물을 내고 있는데 어떻게 여기서 고집을 부릴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불안감.
“하아….”
눈물에 당한 건 변함 없다. 손을 뻗어 미음이 담긴 그릇을 가지려고 하자, 다시 가져가는 설화.
“내가 줄게.”
“아니, 내가.”
“담 오른 일, 금월한테 자세하게 들었어. 팔도 아픈데 내가 입에 넣어줄게.”
예쁘게 숟가락 위에 담아 입으로 후후 부드럽게 분다. 그리고 창살 사이로 숟가락을 내미는 설화.
“미쳤다고 내가….”
“먹어. 팔 아프잖아.”
그래, 팔이 아플 테니까. 누구 팔을 말하는 건지 모르지만. 급하게 가면을 아주 살짝 들어 올려 그 틈 사이로 숟가락을 넣었다. 죽은 따뜻했다. 설화는 무엇이 좋은지 자꾸 싱글벙글 웃으며 숟가락 위에 다음 먹을 걸 올렸다.
언제까지 할 거야? 설마 다 먹을 때까지? 정말로? 그런 눈빛을 보내자 태연하게 다시 숟가락을 든다. 나는… 무력하게 죽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
“형, 내가 다 책임질게. 응?”
“알아서 해.”
무능력 김신화는 할 수 있는 게 없답니다, 하고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작전을 세워야 한다. 작전! 김설화의 농간에 넘어가선 안 된다!
***
“하아…. 그냥 포기해?”
누구 들으라는 듯 내뱉은 말에 인기척이 부시럭, 들린다.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가 당황한 티를 내며 다가온다.
“포기하지 마. 언니는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잖아.”
내 동생이라서 그런가, 아주 잘 아는군. 포기할 성정은 아니지. 지렁이도 밝히면 꿈틀댄다고 나 또한 다를 바 없다. 기이한 현상에 이끌려 알 수 없는 공간에 끌려오는 건 익숙하다.
누운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려 거꾸로 된 창문을 보았다. 김설화, 이곳에 갇힌 지 일주일이 넘었음에도 매일매일 찾아와 나를 도와주는 가족이었다. 밖에 해가 지기 시작했고 이때쯤엔 늘 밥을 가져와 주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어.”
다시 말하지만 내가 이렇게 쉽게 포기할 놈은 아니다.
이곳은 아무런 능력도 없다. 마력도 힘도 심연의 존재도 나의 정신을 보호할 능력도 없고 지능도 작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집착증도 공포증도 없다. 크툴루 월드에서 왔다는 증거는 오로지 내 의지로 쓰고 있는 가면뿐이다. 내 머릿속 친구들도 다 사라져 답이 없다. …그냥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나를 괴롭힐 준비가 된 백범진만 있을 뿐이다.
“정말 곧 끝이야. 그러니까 제발 말을 들어줘.”
그런 상황, 정해진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제일 이질적인 존재. 호소력 높은 목소리를 내며 창살에 붙은 녀석, 내 눈에 비치는 저 녀석이 열쇠였다.
“필요 없으니까 가.”
김설화의 눈이 흔들린다.
‘이미 기억났지.’
일주일 동안 남는 게 시간이었다. 천천히 고민해본 결과 이곳은….
‘어릴 때 본 동화 속이잖아. 역시… 이야기대로 움직이지 않는군.’
이곳은 책 속이고 나는 어머니와 형제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슬퍼하던 주인공에게 신비한 존재가 나타나 도움을 주고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그게 정론. 그러니까… 김설화 입장에서 나를 이대로 두고 싶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김설화와 같은 성정의 인간이라면….
“언니….”
그러니까 도움 줄 거 아니면 말도 걸지 말라고. 나는 부름에 대답 없이 손만 위로 휙휙 저었다.
“이 사람 알아?”
종이를 하나 보여준다. 아주 익숙한 시계 머리를 단 남자. 도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말 위에 탄 그림이다. 글은 읽을 수 없지만, 나는 이 남자를 안다.
벌떡.
“선배님…?”
“역시 아는구나. 이번에 우리 마을에 찾아올 거래. 무언가 찾고 있는 것 같아.”
이게 매인 스토리였구나. 그냥 이대로 살기는 바랐으면서 내가 완전히 포기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던 거군. 이런 걸 숨겨두곤 나를 무력하게 가둬놔?
“뭘 찾고 있지?”
“금으로 된 시계 모양의 바타리? 베타리? 라는 걸 찾고 있,”
나는 창살 사이로 팔을 뻗어 김설화의 깃을 잡아챘다. 으읏, 하며 짧은 신음을 내며 창살에 딱 달라붙었다.
“연기하지 마. 정확히 뭘 찾는다고?”
“언니….”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어?”
떨리는 두 눈, 갈피를 못 잡는 시선.
“아, 아파….”
고통을 호소하는 입. 나는 급하게 손을 놓았다. 내가 너무 세게 잡은 걸까? 아니, 살짝 든 것뿐인데. 하아, 또 속았군.
“공이수도 이곳에 끌려온 것 같아….”
김설화는 방금 고통을 호소한 게 연기라는 걸 증명하듯 능숙하게 옷을 정리했다. 다시 옷깃을 잡기 애매해 갈 곳 잃은 손으로 창살이나 꽉 잡았다.
“공이수‘도’?”
“응, 나도 그냥 온 건 아니지. 내가 진짜 동생도 아니고….”
내 눈치를 힐끔 보고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런데, 본인이 말하기를 이곳에 시간이 고정되었다고 난리를 쳤었나 봐. 그럼 이곳 사람들은 뭘 어쩌겠어. 머리에 괴상한 걸 단 남자가 나타나서 이리저리 설치고 다니니 다들 두려워했지.”
잠시만, 이곳은 분명 어릴 때 본 전래 동화를 모티브로 한 세계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선배님이 나타났다는 건…. 설마 선배님이 오시는 임이라는 건가? 그리고 스토리 상…. 아아아, 선배님 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언니…?”
“아니, 내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지껄여봐.”
“음…. 그래서 배터리를 찾아야 한대. 이유는 몰라. 이것도 시장의 소문으로 들은 거라 너무 놀랐어. 언니가 어떤 힘도 쓸 수 없는 것처럼 공이수에게도 제약이 생겼나 봐. 그리고 돌아가기 위해 찾을 물건이 생긴 것 같아.”
시계 대가리에 배터리라도 꼽으라는 건가. 도대체 무슨 설정인 거야?
본래 내용대로라면 물건의 주인을 찾기 위해 이 마을에 온 것일 텐데.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스토리가 고쳐진 것 같다. 되게 피곤하게 하네. 하지만, 이제야 김설화의 마음을 꺾어 메인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야.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나는 몸을 한 차례 이리저리 돌렸다. 팔다리도 허리도 완벽하게 치유된 상태. 아무래도 설화가 주는 밥을 얻어먹으면 뒹굴뒹굴하기만 했으니 말 다 했다. 아무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니.
“나 여기서 빼줘. 백범진 좀 설득해 봐.”
“뭐 하려고…?”
“기회를 노려야지. 공이수를 만날 기회.”
설화는 대답이 없었다. 전부터 준비하던 게 있다고 했나?
“넌 뭘 준비하고 있던 거야?”
“형.”
처음으로 본래 내 성을 따라 호칭을 고쳤다. 그러나 큰 뜻은 없고 그저 나의 집중을 바꾸려는 시도로 보였다.
“여기는 정말로 심연의 존재가 없어. 나도 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를 정도로 정교하고, 정숙하고, 완벽하게 심연이 배척된 세계야. 공이수의 존재가 변수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백범진만 없으면 말이야. 난 여전히 그가 의심스러웠거든. 연기일까, 아니면 이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일까.”
김설화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음, 또 시작이군.
사실 김설화의 말엔 어폐가 많다. 진짜 심연의 존재와 연관이 없다면 시간도 조선이어선 안되고, 내 눈앞에 설화가 없어야 하고, 공이수도 없어야 한다. 본래 내가 살던 곳은 이런 곳이 아니다.
“아직도 의심을 다 내려놓은 건 아니지만, 연기는 아닌 것 같더라고. 그래서, 저 사람만 없으면 우리 형제가 이 집을 가지게 될 거고. 전 주인인 아버지 밑에 있던 금월도 다시 우리의 말을 들어주겠지. 그리고…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 거 아닐까? …여긴 어때?”
자꾸만 흔들릴 것 같은 마음을 꽉 잡은 채, 꾸역꾸역 목구멍에서 말이 나왔다.
“아니. 여긴 집이 아니잖아.”
“제발….”
이런 세계가 차라리 낫지 않겠냐고? 그런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너는 나의 진짜 동생이 될 수 없다.
“날 여기서 빼줄 거 아니면 가.”
김설화는 한참 대답이 없다가 사라졌다.
***
“네가 벌인 일은 해결해야 하지 않겠나.”
“….”
결국 설화가 나를 그곳에서 빼기로 한 것 같다. 이틀 내리 밥도 안 주더니 백범진 옆에 붙어 화를 누그러뜨리고 설득하는데 힘을 쓴 모양이다. 각오대로라면 한 달 이상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김설화의 표정은 여전히 뾰로통하다. 삐지셨어?
“아궁이 불을 때지 않아 밤새 추운 게 아닌가. 아궁이 불로 해준 쌀밥이 그립구나. 아, 쓸데없이 네가 밟은 장독대는 일부분이 깨져 담을 수 없게 됐다네.”
역시 이 사람은 내가 아는 백범진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조차도, 나를 속이기 위한 연기라면? 김설화가 마지막까지 연기를 늦출 수 없었던 이유를 알겠다. 여전히 불쾌한 목소리에 과장되게 슬퍼하는 게 너무 내가 아는 백범진이었다.
저게 과면 진짜일까 가짜일까. 지금 찔러볼 단계는 아니기에 먼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만족스러운지 웃음을 짓는 백범진.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짓는다.
“오랜만에 딸이 해준 밥을 먹고 싶구나.”
“예예, 해드립죠.”
백범진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아주 맛있는 한 상 차려보겠습니다.”
…자, 첫 번째 미션. 쌀을 씻고 밥을 짓자. 우리 집에는 무려 흰쌀밥이 있다.
‘밥은 문제가 아냐. 어떻게든 되겠지. 근데 반찬은?’
나는 쌀을 대충 씻어내며 생각에 잠겼다. 아궁이를 써본 적은 없지만, 어떻게든 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먹을 밥도 아니었다. 문제는 반찬. 반찬을 어떡하라고? 아, 때려치우고 싶다. 아, 그만하고 싶다.
동화 속 이야기대로라면 지금쯤 도와주는 사람이 나오지 않나?
“상현 씨, 나타나서 반찬 좀 해주세요.”
이루어지리라 생각하지도 않은 채 외친 내 기도. 쌀 씻은 물이 졸졸 떠내려가는 소리에 내 목소리도 파묻혔다. 다시 허리를 붙잡고 일어나 뒤돌려는 순간. 아주 익숙한 앞치마가 보인다. 설마 하며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김신화 님?”
눈을 의심하며 내 위아래를 살펴보는 매우 익숙한 허상현 씨였다. 그래, 내 차림새가 조금 그렇지.
“아, 역시 될 줄 알았어. 감사합니다, 아무개 님!”
그래, 원작에서도 이런 고난이 닥쳤을 때 초월적인 존재가 나타나 도와주곤 했다. 사악한 백범진을 물리치기 위해 나의 동료를 보내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허상현 씨의 밥은 누가 먹어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맛이었다. 이거라면 금월도 허겁지겁 먹겠지.
“아, 상현 씨. 저 김신화 맞습니다.”
크흠. 자세를 고치고 허상현의 차림새를 보고 추측한 바를 꺼냈다.
“혹시 요리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 예. 지금 무슨 상황인 건지…. 왜 신화 님이….”
주변을 둘러보는 허상현. 나는 가짜가 아니다. 당근도 잘 먹는 원본 김신화가 맞다. 성별만 조금 달라진 것뿐이다.
“어떻게 된 거냐면요.”
이때까지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드렸다. 중간중간 당황한 듯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보였지만, 따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내 몸에 관한 거라거나, 지금 내가 괴롭힘당하고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제가… 왔다는 겁니까?”
“예, 잠시 옛 음식으로 한상차림 부탁드립니다. 뭐, 생각해보면 굳이 옛 음식으로 안 하셔도 돼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신화 님은 잠시 앉아서 쉬고 계십시오. 몸이 많이 약해지신 것 같습니다.”
“이제야 한숨 돌릴 거 같네요.”
아주 좋은데? 이 느낌 대로만 가면 백범진 환심 사기 그리고 잠시 방심하게 만들기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 한쪽에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떠나질 않지만 말이다. 금월은 설화가 어떻게든 해주기로 하였다.
다음은 장독대에 물을 채워야 한다. 동화 내용이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너무 유명한 장면 아닌가. 그럼 이제 이곳은 허상현 씨에게 맡기고….
“저는 정말 몸이 안 좋아서 잠시 쉬겠습니다. 다 되면 불러주세요.”
실제로 이 몸뚱이는 감금 이후로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졌다. 그래도 점점 희망이 생긴다. 다음에는 누가 올까. 들키지 않게 조심히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이 약간 따뜻했다. 몸이 푹 쉴 수 있도록 바닥과 한 몸이 되었다.
***
“언니…!”
내 몸을 흔들며 깨우는 설화. 급한 일일까 싶어 몸을 일으켜 질문했다.
“…문제라도?”
“저분이 왜 주방에 계신 거야…? 어떻게 부른 거야?”
아아, 그 부분을 설명하지 않았군.
“아무 데나 대고 기도를 했더니 뿅 하고 나타났어.”
나는 삐거덕거리는 몸을 다시 눕히며 말했다.
“몸이 좀 많이 안 좋으니까 깨우지 말고 본인 할 일이나 해.”
“…많이 안 좋아? 내가 몸에 좋은 탕이라도 얻어올까?”
손을 또 휘휘 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내가 대답해주지 않자 발걸음 돌리는 게 망설여지는지 뒤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나를 보는 듯했다. 그게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더욱 몸을 움츠렸다.
지금 정말 몸이 안 좋았고, 너무 쉬고 싶었다. 크툴루 월드였다면 김신화의 몸과 건강 점수가 비슷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거지 같은 몸뚱이다.
“일단 나는 어머니랑 시장 다녀올게. 공이수가 드디어 시장에 왔나 봐. 궁금하시다고….”
아, 드디어 시작인가.
“내가 금월 잘 설득해놨어.”
설득 맞지?
“어머니가 시킨 일들 다 끝나고 조용히 불러내. 알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드는 한 가지 의문점.
“근데 배터리는 어디 있다는 거지?”
“언니가 여기 있는 것과 공이수가 이곳에 온 걸 보면 분명 주변에 있을 거야. 나가자마자 찾아봐, 꼭.”
***
적당한 휴식 뒤, 백범진과 설화는 소문 따라 시장으로 떠났고 이곳에는 나와 허상현뿐이었다. 당당히 주방 문을 열어 들어가자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국을 끓였는지 보글보글 올라오는 맑은 액체와 육전, 생선구이 그리고 여러 비싼 나물들.
우리 집인데,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닌가? 이 정도면 임금님도 나와서 왕이 되려는 역적 놈이구나, 하고 목을 자르겠다. 왕의 밥상이야, 뭐야? 심지어 허상현 씨가 직접 만든 밥상이라니.
“신화 님.”
“다 됐을까요?”
“거의 마무리됐습니다.”
“어디 잘 보관해주세요.”
이 밥상이면 금월도 아주 만족스러워하겠지? 노릇하게 익은 육전을 조금 맛보게 하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 이쪽은 문제가 안 된다. 설화가 잘해줘야 할 텐데….
“아… 제가 점점 사라지는군요. 돌아가라는 의미 같습니다.”
“벌써 말인가요?”
나도 얻어먹고 싶었는데…. 아, 상현 씨의 전심전력을 담은 밥상이라니. 지금 나의 건강이 원망스럽다.
“조만간 가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나를 향한 가벼운 목례와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 이제… 장독대로 가볼까?
“어떤 방식으로 하면 되는 거지?”
장독대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옆구리가 아예 갈렸는데? 아무리 봐도 내가 만들어낸 흔적이 아니다. 얼마나 얌전하게 올라탔는데. 누가 이렇게 만든 거야? 나야? 나 아닌데? 난 아주 예쁘게 썼는데? 백범진의 작품이로구나! 역시 나를 속이려는 연기인가? 아닌가? 원래 이런 괴롭히는 캐릭터였나?
“아, 이걸 어쩌지…. 공이수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나를 위해 누군가 와서 도와주지 않을까?”
장독대의 조각을 힘없이 주우며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리고 정말 누군가 와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외쳤다.
“….”
음, 이게 아닌가. 나 진짜 급한 건 맞다니까? 몸으로 이걸 막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아, 제발 아무나 와주세요.”
스윽. 스윽?
“…뱀?”
내가 아는 그 뱀이냐? 역시 가짜로 외치는 기도보다는 진심이 낫다. 이 상황에 매우 적합한 이를 보내주는구나.
-여긴 뭐야? 어? 내 몸 상태가 이상한데?
여기도 허상현 씨처럼 크툴루 월드에서 하던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멈칫, 한 자세에 멈춘 채 경악했다. 내 생각에도 경악할 만했다. 그냥 구렁이가 아니다. 내 허리만 한 몸통을 가지고 3미터는 넘어 보이는 몸집을 가진 뱀이었다.
-내 몸이 뱀이 된 건가? 설명해, 김신화.
나는 허상현 씨에게 한 것처럼 능숙하게 설명했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내 눈물겨운 사연에 크게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자, 가라, 뱀!”
내 손가락 끝엔 장독대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뱀은 뭉그적거리며 별로 돕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아….
스스스. 매우 느릿느릿, 귀찮은 몸짓이지만, 안 해줄 생각은 없었는지 장독대의 아래부터 채워나가며 꽈리를 틀었다.
“딱 좋군!”
입구를 제외한 모든 곳이 뱀의 몸 덕에 구멍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제 물을 담을 수 있다. 힘든 몸을 이끌며 한 바가지, 두 바가지.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이런 일은 단숨에 끝날 터인데. 차오르는 숨을 내쉬며 하나씩 채워갔다. 혹여나 여기서도 나를 위해 누군가를 보내줄까 싶어 마음속으로 외쳐보았지만 오는 이는 없었다.
-김신화.
“허억, 뭐….”
뻐근한 허리를 펴며 숨을 돌렸다. 어후, 숨차.
-여기 백범진은 괜찮은 거 맞아?
“나도 모르지? 내가 백범진을 파악하기엔 디버프를 달고 있어서 말이지.”
그 옆에 붙어 있는 것도 힘들다. 차라리 김설화와 같이 지내는 게 천 배는 더 낫다. 설화는 적어도 목적성이 나를 위해서, 이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디버프…? 아무튼 조심해. 원래 만났던 백범진이랑 다른 존재여도 성격이 같다면 마지막까지 방해해 올지도 몰라. 이 집, 원래 네 거였다며?
드디어 절반 이상 채웠다.
“그렇다더라. 다시 빼앗을 필요는 없지. 난 갈 건데. 진짜든 가짜든 문제 될 건 없어. 도와줄 존재가 늘 나타날 거니까.”
그리고 나에겐 공이수가 그런 존재가 되겠지. 그리고 공이수가 능력을 되찾으면 다시 크툴루 월드로 돌아가는 거다. 그러기 위해선 시계를 찾아야지.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
멈칫, 물을 퍼내던 손을 멈추었다. 돌아가서? 다시 크툴루 월드에 돌아가서 또 말도 안 되는 존재들과 싸우고 인위적인 정신병을 달면서까지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나? 무의식적으로 가면에 손이 간다. 진정하기 위해 가면을 더듬었다. 후, 하.
김설화 말대로 이곳에 더 나은 게 아닐까? 심연의 존재가 있다는 걸 확증이라도 하듯 김설화와 공이수가 버젓이 있지만. 그래도 크툴루 월드와는 다른 느낌 아닌가? 이곳은 그런 끔찍한 세계가 아니라 동화 속 아닌가? 그러면, 내 수명이 어떻든 진짜 이 집을 얻기 위해 싸워 얻어낸다면, 그냥 죽을 때까지 김설화랑 살면 되는 거 아닌가? 꽤 나쁘지 않은 세계 아닌가? 어?
-네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이상한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냥 무시하는 게 나을 거야. 그게 널 여기 떨어트린 놈이 원하는 거겠지. 물이나 퍼.
정신을 일깨우는 뱀의 목소리.
“아.”
다시 손을 움직인다. 그렇지. 여긴 가짜다. 그리고 크툴루 월드도 진짜 내 세계가 아니지.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내 집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절차다.
“거의 끝나가는군.”
마법으로 한 번에 붓고 싶다고 생각하며 물을 담는 데 집중했다. 다른 생각은 그대로 흘러가게 두었고. 마참내! 10분을 더 담은 끝에 다 담을 수 있었다. 이 신체의 체력상 크게 크게 물을 담으면 들 수가 없어서 작은 바구니로 옮기느라 너무 오래 걸렸다. 깨진 장독대는 여기 있는 것 중 제일 큰 거였고.
장독대 옆에 걸터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사방을 가로막은 벽 때문에 빨리 어두워지는 기분이다. 슬슬 정말 돌이킬 수 없을지도. 선배님 입장에선 내가 여기 있는 줄 모를 거 아닌가.
“금월 불러올게.”
읏차.
“앗.”
기립성 현기증에 잠시 눈앞에 까매진다. 비틀거리는 나를 꼬리로 지탱해주는 뱀.
“고맙다. 생각해보면 잘 어울리는 거 같아. 그냥 그렇게 살아라, 넌.”
-…헛소리 그만하고 가.
헛소리가 아니라 정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표정이 미세하게 변한다. 아마 찌푸리고 있겠지. 손으로 치마를 탁탁 쳐서 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대문으로 걸어가 문을 쳤다.
쾅쾅!
“하, 그렇게 안 쳐도 되거든?”
“으음,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나지 않나? 금월, 맛볼래?”
김설화가 잘 구워삶았길 바라며 바로 밑밥을 던졌다. 그야, 벌써 해가 지고 있으니까. 안에서 볼 때 착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진짜로 해가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밤이 되면 만나기 어려울 것이고 내일이 되면 이 마을에서 수확이 없어진 선배는 떠날 것이다. 급하다.
“허접 아가씨, 질리지도 않아~?”
아니, 이번에는 다를 거다. 허상현 씨의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맛, 너도 먹어봐라!
주방 문을 열자 천으로 덮어놓은 반찬들이 보인다. 그리고 고기반찬을 들어 내밀며 권유했다. 금월이 냄새만으로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는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자자, 먹어봐. 맛만 있지.”
이게 허상현 씨가 만든 건 줄 모르기 때문에 오는 반응이다. 하지만, 분명 한 입 베어 물면 이 세상맛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것이다. 아, 침이 나오는군.
우물우물, 말없이 육전 하나를 열심히 삼켰다. 먹는 속도가 남다르신데?
“흥, 뭐, 허, 허접, 이것 가지고 되겠어~?”
하나 더 주우러 가는 그 손은 뭔데? 어허.
나는 그 손을 제지하며 급하게 손목을 잡았다. 지금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다. 물을 담는데 40분을 써버렸다. 중간중간 쉬지 않으면 머리가 핑 돌 것 같았단 말이다.
“맘에 들었다는 거지? 저기도 봐주셔야지. 빨리 와.”
“읏, 뭐 하는 거야!”
금월의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겨 장독대를 향했다.
“자, 어때?! 빨리빨리.”
“헤에, 이걸 일일이 다 한 거야?”
눈빛으로 한심하다고 말한다. 왜? 뭐가 문제지? 내가 정답을 찾지 못하자 금월은 손가락으로 구석을 가리켰다. 내가 감금당했던 집 뒤, 나무 그늘에 가려져 매우 어두운 곳. 지난번에 집을 둘러볼 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없었잖아?! 없었다고! 그냥 없었잖아!
“아, 젠장!”
이곳을 만든 놈이 날 놀리려고 하는 건가? 왜 멀쩡한 장독대가 그대로 있는 건데?
그렇다. 저곳에는 온전한 형태의 똑같은 크기의 장독대가 있었다. 니알라의 불친절한 설명조차 없으니 모르겠지만, 무언가 작용한 게 분명하다. 아마 뱀을 부르는 형태가 아니라 저걸 들고 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는 것. 내 노동에 드는 힘의 총량은 같다고 쳐도 뭔가 기분이 나쁘다. 나를 엿 먹이려는 거잖아.
-당했네.
뱀도 이 상황이 웃긴 지 실실 웃었다. 어차피 본인은 잠시 불려온 입장이라는 거지? 뱀, 너도 언젠가 똑같은 일을 당하길 바란다.
“자, 이제 됐지? 잠깐 내보내 줘.”
금월은 비웃으면서도 몸은 부엌으로 향했고 나는 그 행동을 허락의 신호로 알았다. 육전 다 빼먹겠네. 뱀이 뒤에서 뭐라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이곳은 전기 하나 없는 곳, 해가 지면 대부분이 보이지 않아 활동을 멈추고 잠을 잔다.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게 대부분.
“아, 그래서 금시계는 어디 있는데?”
이런, 힌트도 없이 이 넓은 마을을 뒤지라고?
“분명 의도가 있을 거야.”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일단, 금시계의 생김새도 크기도 모르니 이 부분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니 지나가다 보면 또 아는 얼굴이…. 아는 얼굴이…. 아는….
…장현덕? 왜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 장사하고 있는 거냐? 내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놀라며 보따리 짐을 숨겼다. 아니, 왜? 이때까지 나를 모르지는 않았는데….
“장현덕 맞지?”
“어어?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는지….”
더욱 경계하며 보따리를 숨긴다. 아, 지금 나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지.
평소 아는 장현덕은 내 모습이 아무리 바뀌어도 본질만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헷갈릴 일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공이수처럼 진실안도 작동하지 않는 거겠지.
“왜 바닥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거지?”
“호, 혹시 그 일행이신 거예요?”
“무슨 일행?”
“저 아무것도 없어요. 지난번에 다 드, 드렸잖아요. 상납도 했는데.”
나는 이마를 탁하고 쳤다.
“언제부터 있던 거야?”
“그, 그 제가 많이 못 팔았어요…. 돈, 돈 없어요.”
어쩌다가 이런 비 쫄딱 맞은 강아지가 되었냐.
“아니, 언제부터냐고.”
“한… 일주일?”
나와 같은 시기에 온 거다. 허상현이나 뱀처럼 잠깐 온 것도 아니고 일주일이나 이 길거리에서 물건을 팔고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누군가에게 저당 잡혀 돈을 모으기 위해 물건을 팔고 있다.
“일어나.”
“네?”
“일어나라고.”
“아, 네. 어어, 어? 이 느낌 어디서 많이 느꼈는데….”
그래, 나다. 이 자식아.
“나 김신화다.”
“네에?! 마법사님이시라,”
“쉿! 목소리 낮춰.”
나는 급하게 입을 막았다. 장현덕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자꾸만 입을 벙끗대다가 내 몸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고.
“후우, 믿기 힘들겠지만 맞아.”
장현덕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천천히 손을 떼자.
“그, 그럼 왜 여기서 그런 모습으로… 계신 거예요?”
“그럼 너는 여기서 왜 장사하고 있냐?”
울먹이는 장현덕.
“아…, 갑자기 이동됐는데, 주변엔 옛날 집들만 보이고, 마법사님은 안 보이고…. 그랬는데… 그, 갑자기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저를 괴롭혔어요. 그러다가… 협박을 당해서 물건을 팔고 있었어요.”
보따리 안을 보여준다. 내가 한옥에서 지내 물건의 기준이 달라져서 일수도 있지만 정말 형편없는 싸구려 물품들이다.
“벌어들인 수익은 바치고?”
“네에….”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다. 덩치도 산만한 게 협박에 못 이겨 물건을 팔아? 잘 먹고 잘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조선 사람보다 몸도 좋을 텐데. 내가 아는 우리 현덕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낯선 공간이 주는 공포 때문에 원래도 잘 안 돌아가던 머리가 더욱 돌아가지 않았던 걸까? 아무튼, 이 상황이 다른 의미로 너무 이질적이고 비정상적이다.
그렇다면 왜 장현덕이 여기에 있는 걸까. 의도가 뭐지?
“너 혹시 뭐, 물건 중에 금시계 본 적 있어?”
“금시계?”
“잘 떠올려봐.”
음, 으음. 깊은 고민에 빠진 장현덕. 계속 고민에 빠지는 장현덕. 시간이 없다.
“빨리 좀 생각해봐.”
“으으음, 저는 진짜 몰라요. 근데 물건들이 쌓여있는 곳은 알아요!”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보따리에 있는 물건들이?”
“네!”
조선의 다■소냐? 이런 물건들이 잔뜩 있는 곳이란 말이지? 장인들이 모여 있는 거리일 듯한데…. 과연 그런 데서 금시계를 발견할 수 있을까? 확실치도 않지만 장현덕에게서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이게 끝이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빠르게 찾아보자.”
이곳에 안내NPC처럼 장현덕을 세워둔 것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장현덕이 주는 정보를 따라간다면 금시계를 발견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반대로 장현덕이기에 믿을 수가 없다. 물 다 채우고 보니 멀쩡한 항아리가 뜬금없이 있던 것처럼 이것도 나를 헷갈리게 하고 정답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군.
“마법사님.”
“나 지금 마법사 아니야.”
“어어, 그럼, 그… 누님?”
깡.
“악! 왜 때리시는 거예요?”
사람 머리를 때린다고 깡, 하고 울리지는 않는다. 내 머리가 그렇게 소리를 인식했을 뿐이다. 속이 많이 비었군, 아주 잘 울리겠어.
“지금 네 상황이 되고 싶어서 됐냐? 그냥, 어? 손위 남자를 다르게 부를 수 있는 호칭 있잖아!”
“뭘 말씀하시는 걸까요…?”
“됐다, 됐어. 빨리 앞장이나 서.”
“네!”
당당한 걸음걸이로 익숙한 듯 거리를 나선다. 일주일 동안 고생깨나 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래도 양반이지, 현덕이는….
“길이 어디더라…?”
뭐? 하, 내가 장현덕에게 이걸 맡기는 게 맞나?
그 자리에 서서 고민하더니 ‘아마 이쪽이던가~?’하는 가벼운 말과 함께 다시 발걸음을 땠다. 정말 장현덕의 뒤를 따라도 되나 깊게 생각했다. 역시 함정? 또 멈추는 것 봐. 아무래도 말을 해야….
“현….”
“여기예요!”
갑자기 외치며 모퉁이 너머를 가리킨다.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자, 정말로 시장이 있었다. 사람 수는 적었다. 그러나 열기는 상당했다.
“어? 시계 머리!”
익숙한 뒤태가 보인다. 모르는 사람이 말 고삐를 잡고 옆에 서 있었고 선배님은 땅 위에 서서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게 보였다. 장현덕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고 장현덕과 눈을 마주친 공이수는 놀라며 대화를 급하게 마무리하고 우리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너, 후배님 옆에 붙어 있던….”
나를 한 번 보고는 다시 관심을 끈다.
“그 노란 머리 맞지?”
저기요? 그쪽도 나를 몰라보시네.
“맞아요, 그 마법사님의 선배님… 으음, 맞나? 맞으시죠?”
“그래. 네가 여기 있다는 건 근처에 후배가 있다는 말인가. 어디에 있지?”
공이수가 주변을 넓게 둘러본다. 그 찾으시는 분 바로 앞에 계십니다. 크흠, 목을 조금 가다듬고.
“제가 김신화입니다만?”
“네네! 맞아요. 이분이 마법사님이세요!”
공이수의 분침이 파르르 떨린다. 시계가 위아래로 흔들린다. 그리고 경악한 목소리를 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왜…?”
“저도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에요, 선배님.”
“으, 정말 맞나보군. 그 목소리로 선배 같은 소리 집어치워라.”
나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가까이 붙었다.
“뭐라고요, 선배?”
“악, 썩 꺼져!”
에헤이, 그렇게 축객령을 내리시면 쓰나. 도우러 온 사람한테.
“금시계 찾으신다면서요. 저도 선배를 위해 열심히 찾고 있거든요. 인성도 능력도 출중한 후배의 도움이 안 필요하세요?”
“…뭔가 힌트라고 있는 건가?”
“글쎄요? 일단 이 마을에 있는 건 분명합니다.”
나는 이때까지 지나온 스토리를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당한 일에 대해서 들을 때는 흥미가 있어 보였지만, 탈출 이후에는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론은 여기가 메인일 것이다, 이 말이지?”
“네, 선배님.”
“그놈의 선배…. 하, 아니다.”
돌아오는 긍정적인 반응에 안심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렇게 만나서.”
“그래, 일단 서로의 존재는 인지했으니 떨어져서 찾아보는 걸로 하지.”
“같이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싫다.”
“에에, 선배님 너무해요.”
“닥쳐!”
예민하시구먼. 음,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까?
장현덕이 이곳에 있는 이유. 작지 않은 마을인데 우연히 거리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공이수. 그리고 이곳도 시장 근처임에도 백범진과 마주치지 않았다는 점. 이 모든 걸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장현덕의 쓰임새는….
“자, 현덕아. 이 문제는 시험에서 1점짜리 문제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생각해. 알았지.”
“우에?”
그래, 지능 수치를 더 내리라고!
“네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가봐.”
“에? 진짜요?”
“그래!”
어, 어어, 흐음, 으으음, 하고 이상한 허밍을 넣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진짜로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요?”
“그래, 아. 대신 금시계를 찾는다는 기분으로.”
“아! 이해했어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이해도 필요 없어. 그냥, 가. 금시계만 생각해.”
“에에, 그럼….”
장현덕이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나는 장현덕의 그림자일 뿐, 그의 걸음에 일정 관여하지 않는다. 오로지 현덕이의 발을 믿는다. 지금만큼은 짱현덕이니까. 그래, 너는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금시계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
“뭔가 여기 아니면 여기로 가고 싶은데…. 어느 곳을 고를까요~ 알아맞혀 봅시다! 저쪽~.”
가면 갈수록 신나는지 노래도 흥얼거린다. 걷기 시작한 지 5분. 길어지고 있지만 현덕이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방금 이 넓은 마을에서 단번에 선배님을 찾은 놈이다. 분명 이것에 열쇠가 되어줄 거다. 이번에는 내가 잘했지? 잘했겠지?
“마법사님!”
“찾았어?!”
“아뇨! 막다른 길이에요!”
….
“어, 음, 그래도 이 벽 뒤에 뭔가 있는 건 아닐까요??”
“…확실해?”
내가 또 치마 입고 벽 타기 전문가지.
“네! 이 뒤를 확인해보고 싶어요.”
나는 치맛자락을 잡고 외쳤다.
“등 좀 빌려줘.”
“예에?”
얼 타면서도 허리를 숙여주었다. 나는 그 허리에 발을 대고 말했다.
“힘줘.”
지난번과 다르게 이번에는 확실하게 동료가 있었다. 거기에다가 벽에 그리 높지 않다. 2미터 조금 안되나? 장현덕의 허리를 밟고 올라간 뒤, 맨 위에 매달리면 충분히 건너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읏챠.”
지난번에 다리를 그냥 올리다가 치마를 밟아 넘어지는 일 같은 불상사가 나지 않기 위해 옷자락을 다시 한 번 꽉 잡아 올렸다. 그리고 한 발 내디뎌 올라탔다. 밑에서 크윽, 하는 소리가 들린다. 금방이다. 짱현덕 너는 할 수 있다.
치맛자락을 잡은 손을 풀고 벽 위로 올라타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똑같이 팔뒷굼치로 몸을 지탱하고…. 일단 너머를 눈으로 확인한다.
“…!”
밑에서 흥분한 목소리가 들린다.
“진짜 있어요? 있어요?”
“현덕아.”
“네!”
“내 다리 좀 더 올려줘.”
현덕이가 방방 뛰는 소리가 들린다.
“진짜 있다는 거죠? 야호!”
“으윽, 빨리 올리지 못해!”
“아, 죄, 죄송해요!”
다급하게 달려와 내 다리를 붙잡아 지탱해준다. 아주 천천히 다리를 올려 벽 위에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밑으로 내려가 빠르게 금시계를 주웠다. 그리고 주변을 보니 조금 멀게 빙 도는 것처럼 보이긴 해도 길은 나 있었다. 근데, 여기서 헤어지면 장현덕이 다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뭐야? 너 왜 여기 있냐? 시장도 아니고… 보따리도 내팽개치고. 설마 도망가려는 건 아니겠지?”
??
벽 너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아아, 그게 아니라 중요한 물건을 찾느라….”
“집도 없는 녀석이 무슨 중요한 물건이 있다고 그래?”
안 된다. 내 나침반!
분명 거지꼴로 장사하고 있던 이유가 괴롭히는 녀석들 때문이었다. 내 귀중한 나침반을 저런 상태로 만든 녀석들이로구나! 다시 저쪽으로 빠르게 돌아간다. 일단 이 담을 치마 입은 채로 빠르게 넘어갈 수 없다. 능숙해졌다고 해도 한계가 명확하다.
애초에 벽 뒤에서 머리가 불쑥 튀어나오면 이상함을 느끼고 공격해 오겠지. 그러니 반대로 뛰어간다. 최대한 빨리. 다시 치마를 꽉 잡아 들어 올린다. 이런다고 불편함이 가시진 않으니까 뛸만하다.
이 골목을 나와서…! 양쪽 중 어디 모퉁이가…!
“…언니?”
설마, 아니지?
“왜, 여기… 있는 게냐?”
엄청나게 스산한 목소리. 내 몸이 저절로 경직된다. 이겨내야 해. 안 돼. 안 돼….
“김설화!!”
나는 악을 쓰며 김설화의 이름을 불렀다. 이게 마지막 희망이고, 내 의도를 파악하길 바라며 에타게 외쳤다. 이곳은 동화 속이다! 게임도 아니고, 능력도 없으니 이건 그저 트라우마다. 그러니, 물리적인 공격에 방어할 수단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니까…. 그러니까 뒤에 서 있는 김설화가 뭐라도 해주면….
설화의 몸짓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인다. 무려 바구니에 든 호박을 꺼내 든다. 그리고 아주 침착하지만 아주 빠르게… 높이 들어 올려….
뽜각!
굉장한 파열음을 내며 백범진의 머리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고 그대로 백범진은 기절했다.
“….”
“….”
뭔가 이상한 물리 작용이지 않았어, 방금? 백범진이 머리를 깬다고 바로 쓰러져? 가짜… 인가?
“….”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설화야. 일단 빠르게 요약할게. 금시계 찾았고 장현덕이 위험해!”
“뭐? 어떻게 찾았어?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장현덕이 또 위험하다고?”
또라고?
김설화는 당장 달려갈 것처럼 몸을 돌리려다가 다시 백범진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이렇게 두고 가?”
“그래, 알아서 하겠지!”
김설화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나와 함께 자리를 떴다. 바닥에 쓰러진 백범진에게서 약간의 움직임을 느꼈지만…. 지금은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
“장현덕!”
“뭐야, 저…. 저…. 흐익! 저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음? 무슨 반응이지 저건? 사내 넷이서 장현덕을 둘러싼 채 위협하다가 돌연 쫄았는지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반대편은 막다른 길.
나보다는 오히려 뒤를 보는….
“…김설화.”
“응.”
“뭘 한 거냐?”
설화가 숨을 돌리더니. 볼을 긁적이며 해명 아닌 해명을 한다.
“그게… 나는 장현덕을 알아. 늘 지나갈 때마다 봤었거든. 근데 저 패거리가 괴롭히길래. 장현덕에게 일이 생기면 언니가 힘들어할까 봐…. 조금 손을 봐줬지.”
“근데 쟤네 자세가….”
어정쩡한 자세로 벌벌 떠는 녀석들. 설화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내 시선을 벗어난다.
“조금 발로… 찼지.”
…인간이냐? 인간 맞아? 아니, 인간 아니잖아. 어떻게 그런 끔찍하고 악랄한 짓을?! 나는 괜히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설화에겐 깝치지 말자. 설화가 내 팀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도움을 안 받은 게 없을 정도로 중요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시대적 상황 따위는 뛰어넘는 미친 실행력에 혀를 내두를 정도.
“빨리 안 꺼져?”
그건 그거고. 우리에겐 나침, 아니 현덕이가 필요하단 말이다.
“예, 예예!”
우르르르, 흙먼지를 일으키며 골목 너머로 사라진다. 현덕이에게 다가갔다.
“자, 우리 금시계도 찾았어. 상황이 절망적이지 않아. 몸은?”
“괜차나여…. 흐윽.”
괜찮기는.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가자. 공이수 찾으러.”
“네에…. 또 제가 길 안내 하면 되나요?”
“그래, 부탁한다. 이번에는 확실히 지켜줄게.”
우리는 거리를 다니기엔 너무 특이한 조합이라 시선을 계속해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현덕은 아까의 상처를 딛고 다시 기분 좋게 길을 찾아다닐 뿐이다.
***
“다가오지 마….”
그 시각, 공이수. 인생 최대의 난관에 봉착한다. 과연 눈앞에 있는 백범진은 그때 그 백범진일까? 아니면 이야기 속 등장인물일까. 어느 쪽이든 금시계를 든 채로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백범진. 어디서 무얼 하고 왔길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호박씨가 여럿 붙어 있는 걸까.
역시 알고 지내던 백범진이 아닌 건가.
“이걸 금시계…라고 부르던데….”
“어디서 그걸 발견한 거지?”
“알려줄 수 없다네. 궁금해서 말이야. 자네에게 이게 왜 필요한지 알려주게나. 그럼 주겠네.”
성격은 더러운 게 아주 판박이다.
“그 전에 그게 무슨 용도인지는 아나?”
“…그게 중요한가? 그대 머리도 기이하니 이것도 기이한 물건이겠지.”
공이수는 눈앞의 백범진이 진짜가 아니라면 굳이 경계할 필요는 없다. 저게 진짜 금시계라면 배터리로서 작동을 잘할 것이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안락한 감금 생활을 이을 수 있겠지.
그러나 잘 선택해야 한다. 기회는 한 번뿐. 진짜 배터리가 아닐 경우,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 끊임없이 자신의 임을 찾아 여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임은 떠나고 홀로 남아 정처 없이 이곳을 영원히 떠돌게 되겠지. 그를 믿을 수 있는가? 진짜라고 믿겠는가?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야.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물건이지. 이제 내놔.”
“이곳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양놈들도 머리에 기이한 게 달렸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네. 도대체 어디에서…. 뭐, 설명해주었으니 약속대로 주겠네.”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너만은 진짜가 아니군. 왜지?”
어떤 기준으로?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나는 나라네.”
온화한 미소를 띠는 백범진. 공이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역시 아닌가? 그냥 김신화를 다려야 하나? 끔찍한 개자식 김신화를 믿기 대 성격만 같은 가짜 노괴 백범진을 믿기.
“잠시만 기다려 보지. 일행이 더 있어서 말이야.”
백범진의 미소에서 조급함이 느껴진다. 공이수는 조금 안심했다.
“빨리 받게나.”
“아니, 무조건 기다린다.”
공이수는 더욱 확신하며 팔짱을 꼈다. 확실하게 하려고 주먹을 쥐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게 하였다. 그렇게 째깍, 째깍. 시간은 간다. 해가 지고 모두의 활동이 중지되면 다시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
저 멀리서 바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왜 저 새끼가 먼저 있어?”
“나도 몰라!”
만찬의 제물과 그 일행이 뛰어온다. 어쩐지 더욱 신뢰가 가지 않는가?
***
“허억, 백범진, 어떻, 게 먼저 온 거지?”
이상하다?
후우, 후우. 숨을 고르며 진정하기 위해 애쓰자 어디서 났는지 김설화가 주섬주섬 물을 꺼내더니 내 손에 쥐여준다. 물을 벌컥벌컥 마셔주고 숨을 돌리기 위해 허리를 잡고 고개를 젖혔다. 하늘이 핑 돈다. 하, 진짜.
“그 손에 금시계는 뭐야? 역시 너 진짜 백범진이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흐음….”
그냥 생각이란 걸 하지 마세요, 어머니.
“자, 설화야. 한 번 더 깨!”
“응!”
뽜직!
아까 이곳으로 뛰어오면서 확신에 찬 말투로 백범진의 상태에 대해 알려주었다. 대화해보면 매일매일 시장에 나가 하는 대화는 비슷했으며 묘하게 백범진 같아 보여도 표면만 들고 온 느낌이라고 했다. 나는 ‘역시 가짜지?!’라고 했고 설화는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알려준다. 내가 아는 백범진은 이런 사람이 아니다. 일단 가짜 백범진 처리 완료. 다시 몸을 돌려 당황한 시계를 보았다.
“선배님, 이 장면 뭔지 알 것 같아요. 예상가세요?”
“뭔 예상?”
아이고, 이 선배 안 되겠네.
“여기 옛날에 본 동화 속 세계에요. 지금 이 마을에 온 게 배터리를 찾으러 온 거지만 분명 가짜를 누군가 들고 오리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진짜를 들고 온 것은 바로 저죠.”
옆에 서 있던 설화가 고개를 끄덕였고, 장현덕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한 채 넋 놓고 있었다. 아차, 저쪽에는 딱히 설명을 안 했군.
현덕이에게는 지금 급하게 설명해줄 필요가 없긴 하다. 아무래도 금시계를 찾은 게 가장 큰 공로였으니 나중에 칭찬은 조금 해줄 만할지도.
“하고 싶은 말은?”
“제가 주인공이고 백범진은 악역이죠. 저 사악한 웃음을 보십시오! 선배님!”
아! 방금 기절시켰지.
“아…무튼! 왜 망설이시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저랑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
“닥쳐봐! 아니, 너한테 한 건 아니고.”
꽤… 많이 혼란스러우신가 보다. 암, 그럴 만도 해. 갑자기 아무것도 안 되지, 죽은 사람이 돌아왔지. 역시 믿을 사람 나 뿐인 것 같은데.
도대체 공이수에게 제약까지 주면서 이런 상황에 집어넣은 존재는 누구지? 그리고 원하는 건 뭐지? 아니면 원하는 것 따윈 없는 걸까. 무얼 더 바라서 이런 상황에 집어넣은 거지? 심연의 존재들의 의중을 알 수가 없다. 왜 이런 세계? 하필 동화인 거지?
“언니, 진정해.”
“아.”
내가 또 생각의 늪에 빠진 걸 알고 용케 꺼내주었다. 역시 설화다.
“후배님.”
“예, 선배님.”
공이수는 다시 망설이며 입을 열지 못한다.
“네 건 진짜 맞아?”
“맞다니까요? 선배, 정말 저 악랄한 악녀를 믿을 거예요?”
“어디서 찾은 건데?”
“길에서 주웠죠. 아니이~ 선배님. 일단 잡아보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건 안 된다. 계속 여기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해.”
아차, 뭔가 선배님만의 제약이 있었군.
“그래도 백범진 보다는 제가 더 믿음직하잖아요? 설화야, 그 손에 든 거 줘봐.”
“이거 말이야?”
바닥에 널브러진 백범진의 손에 있는 금시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설화는 내 손 위에 그것을 주었다.
“선배님 머리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상처가 나지 않겠죠? 그럼 배터리도 안 깨지겠죠?”
백범진이 들고 온 시계를 바닥에 세게 던졌다. 선배님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깨지면 어쩌려고…!”
“이걸, 그냥.”
치맛자락을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오른발을 들어 힘차게 금시계를 향해 밟는다. 콰직, 콰직.
“■■[대제어: 엄청] 밟으면, 됩니다.”
이게 빠르게 해결 보는 방법 아닐까? 콰직, 콰직, 콰직.
반복되어 들리는 파열음. 콰직. 점차 흩날리는 금가루, 그리고 금이 가는 내부. 콰직. 이건 이 세계가 방 탈출이라면 탈출에 필요한 핵심 도구였다. 그리고 이곳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쉽게 도구가 망가지는 방 탈출 게임이 아니다.
“이번엔 제가 들고 온 것도 밟아보죠.”
오늘 발을 들어 내리찍으려는 순간.
“어어, 언니 잠시만!”
김설화가 급하게 내 발을 막았다.
“언니 발목 부러져.”
“김설화, 너 역시 다 알고 붙어 있었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저 반응 보셨죠? 아, 선배님, 얘가 누군진 알고 계시나?”
시계가 좌우로 흔들린다.
“뭐, 여기서 심연의 존재랑 제일 가까운 존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뭐? 아니, 근데 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배 반응이 왜 그러시지?
“왜요?”
“왜 붙어 있는 거야?”
“그야 제 동생이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이곳의 역할로서도 동생인 포지션이지만 실제로도 내 동생이 맞다. 조금 악랄한….
“그으…. 아니다.”
뭐지? 알 수 없는 반응에 물음표를 띄우며 내가 가져온 금시계를 들어 올렸다. 장현덕 덕분에 진짜 배터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백범진이 금시계를 찾은 경위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제 진짜 돌아갈 수 있다.
“선배님, 이건 진짜 같죠?”
“너는 지금 위화감이 없어? 저, 저 녀석이?”
“?”
불규칙하게 울리는 시계. 째째깍, 째깍, 까각, 째, 깍.
왜 저렇게 불안해하고 있는 걸까? 이제 곧 돌아갈 수 있다니까? 나는 배터리를 내밀었고 선배님이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러자 공간이 깨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위로 향했고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울리며 하늘이 깨지고, 텅 빈 우주가….
“…아.”
뭔가, 뭔가이상한데? 이건….
“후배님, 동생이 아니야, 저거. 정신 차려.”
“아?”
공이수가 잡가지 내 팔을 잡더니 갑자기 시간을 접듯 순간이동 했다. 나는 여전히 마법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아 그저 텅 빈 곳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공이수만이 모든 게 돌아온 듯 보였다.
여러 번 시도해 볼 만도 한데…. 어느 순간 가만히 멈춰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미안하다.”
왜 나한테 미안해? 설명은 해줘야 할 거 아니야?!
공이수는 내 팔을 쥔 손을 풀었고 나는 허공으로 떨어졌다. 왜? 어째서? 미래를 보고 온 건가? 무슨 일이 일어나길래? 더 뒤로도 갔다 온 건가? 뒤로는 갈 수 없었던 건가? 배터리를 찾던 공이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던 공이수였던 건가?
나는 아주 천천히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향해 떨어졌다. 떨어졌다.
“잡았다!”
갑자기 옆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내 팔을 잡았다. 두둑, 하고 어깨가 빠지는 통증이 아릿하게 울려왔다.
“형, 그 밑은 안 돼. 소멸할지도 몰라.”
“…이게 뭐야?”
나를 물고기를 낚은 것처럼 들어 올린 설화. 그곳은 평범한 서재였다. 그러나 책이 몇 권 꽂혀있지 않았다. 한 열 몇 권이 덩그러니 꽂혀있었다.
“이게 뭐야?”
“형의 몸은 실체가 없어서 다른 것에 입힐 수밖에 없었어.”
슬픔에 잠긴 목소리.
“그렇다고 아무런 실체가 없는 상태로 두기에는 형의 정신이 너무 위험해. 광기를 막아줄 수 없어. 그래서 생각한 거야. 그럼 다른 몸을 주면 되는 거잖아? 형이 여러 인격을 가지듯이… 나도 여러 모습의 형이 가지고 싶어.”
책 한 권을 가져와 내 눈앞에 보여준다.
“형 머릿속에 있던 책이야.”
[콩쥐팥쥐]
“이 이야기가 재미있었냐 없었냐가 중요한 게 아니지. 또 하나의 형의 모습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근데, 형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
….
“다음은 어디로 가볼까? 형이 만족할만한 세계를 찾아보자.”
김설화가 책을 꽂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나는….
“설화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나의 완전한 죽음을 막기 위한 김설화의 행동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