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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다리 주석 병정 - 레인비

1.

양서호는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에 드리운 커튼 사이로 어슴푸레한 푸른빛이 새어 들어온다. 방금 일어난 참임에도 개운한 정신으로 머리맡의 시계를 바라본다. 정확히 오전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잠기운과는 별개로, 양서호는 잠시 이불 속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집안을 채우는 서늘한 공기가 싫어서였다. 약 1분 정도 늦장을 부리던 양서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 아침은 뭘 먹어야 하지. 어제 오트밀이 떨어졌던가?’

한동안 정신없이 지내느라 채워두는 것도 잊고 있었다. 굶게 되는 건가 싶어 걱정하며 방문을 열자,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칠칠맞게 불을 켠 채 잠든 것은 아니다. 이 집의 두 번째 인물이 이미 깨어 있었던 모양이다. 슬리퍼를 끌며 부엌으로 향하자, 인덕션 앞에 서 있던 인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일어났어, 누나? 밥 먹어.”

그는 식탁 위에 놓인 그릇을 가리켰다. 그릇 안에는 양서호가 늘 먹던 대로 오트밀과 요거트가 담겨 있었다.

“뭐야. 사 왔어?”
“다 떨어졌는데, 아무 말도 없길래.”

인덕션 위 주전자가 ‘피쉬식—’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뿜어낸다. 양서호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부엌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집에서 그녀는 늘 혼자였다. 사실, 어린 시절 이후 대부분의 나날이 그랬다. 누군가와 함께 지낸다는 건, 그 사람과 양서호 모두에게 큰 스트레스였다. 상대는 그녀를 두려워하고, 양서호는 상대를 해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렇기에 이 상황은 그녀에게 인생 처음 겪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김신화. 과거 출입국외국인관리청 특수 1팀 팀장이었던 그의 부하이자, 지금도 그의 부하인 인물.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집 부엌처럼 사방을 누비며, 양서호의 옆에 따뜻한 꿀물이 담긴 컵까지 놓아두고 갔다.

‘첫날만 해도 방 바꿔달라고 온갖 난리를 치더니. 이제는 적응했나 보지.’

양서호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듯 짧게 숨을 내뱉었다. 적응이라니. 예전에도 김신화는 뻔뻔하고 태연한 편이었지만, 요즘은 더욱 그렇다. 당당하게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질 않나. 황당해서 딱히 지적하지 않았더니, 어느새 그 호칭이 굳어버렸다. 뭐, ‘양 팀장님’이라는 딱딱한 호칭보다는 듣기 좋긴 했다.

‘기억을 잃어서 좋은 점도 있군.’

오트밀을 해치운 양서호는 출근을 위해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정복이 손에 들렸다. 대한민국의 절반이 날아가고, 세종시가 파주를 대신한 방어선이 된 이후로, 그녀는 줄곧 정복을 요구받고 있었다. 국민의 영웅이라는 양서호의 대외적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였다.

‘날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최근엔 외국인관리청 팀장 이상의 직무까지 요구받고 있다. 명령 자체는 납득할 만하지만, 성가심은 또 다른 문제다. 세종시의 수호자? 그런 거창한 직함을 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세종시의 수호자이자, 대한민국의 수호자였다.
자신도 모르게 눈매를 좁히며, 입고 있던 잠옷의 상의를 반쯤 벗은 그때, 방문이 열렸다.

“누나, 그거 입을 거면 이거 다려놨… … 음. 미안?”
“나가, 이 자식아.”

손에 들고 있던 베개를 던지자, 믿기 힘든 속도로 날아간 그것이 김신화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재빠르게 물러났다.

“으악! 아, 알았어! 미안해! 아무튼 다려놓은 거 거기 있으니까 그거 입어!”

양서호는 방문 앞에 가지런히 놓인 정복을 손에 들었다. 구김 하나 없이 잘 펴진 모습. 그걸 바라보다가 그녀의 입가에 어느새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상의를 벗은 채, 김신화가 두고 간 정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무튼, 요즘은 계속 이런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동거인을 집에 들인 것. 그것만큼은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김신화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에게 자신과 함께하는 공포를 안겨주고, 자신이 그를 해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하는 리스크를 짊어지고서라도.

두 달 전, 김신화는 폭주했다. 세종시를 기준으로 북쪽의 대한민국은 과거 파주와 비슷한 꼴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과 달리, 충청북도 부근까지는 아직 수복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진행된 천안 수복 작전. 이 또한 외국인을 몰아내는 작전이라며 그녀의 팀에서도 인원이 차출되었다.
물론 세종시 수호가 1순위인 양서호는 그 작전에 참여하지 못했다. 1팀에서는 그녀를 대신해 신우진과 김신화가 참여했다.

그리고, 김신화는 천안시의 1/5을 수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해버렸다.

양서호가 제압 요청을 받고 급히 달려갔을 때, 상황은 이미 종료되어 있었다. 무너진 건물들, 부상당한 공무원과 군인들, 심연의 마력에 잠식되어 탄현화된 천안의 경계선. 현장 인원의 안내를 받아 그녀는 시가지로 향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몰려 있던 도심 한복판, 김신화는 구속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서호를 침착한 눈으로 바라보는 신우진과 함께.

‘왜 이제야 온 거야, 팀장님.’

김신화는 감옥 대신, 정부에게 끌려갔다. 보통은 외국인이 끌려가는 그곳으로.

그때를 떠올리며 신발을 신다 말고 멈춰서자, 김신화가 의아한 듯 다가왔다.

“그, 누나? 표정이 무서운데. 무슨 일 있어?”

양서호는 그를 돌아보았다. 김신화는 얼굴 전체를 덮는 이상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이전엔 쓰지 않던 것이었다.
그녀는 초자연현상에 휘말려 이상해지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이것도 그 일환이겠지. 그러나 그 변화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기분을 털어내듯, 양서호는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넌 대체 언제 출근할 셈으로 이렇게 늦장을 부리고 있는 거야?”

목적지도 같기에 함께 나갈 생각이었는데, 그는 아직 외출복조차 입지 않은 상태였다.

“금방 나갈 거야. 먼저 가, 누나.”

김신화는 태연하게 한 손을 흔들며 배웅하듯 말했다.

“지각하지는 마라.”
“네, 네, 팀장님~.”

고개를 살짝 저은 양서호는 정복의 칼라를 다듬으며 현관문을 나섰다. 쌀쌀한 바람이 복도를 스치자 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순간, 예기치 않게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

“…아.”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레 꺼낸 물건은 은백색 광택이 도는 하트 모양의 주석 펜던트. 과거, 기억을 잃기 전의 김신화가 준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었다.

‘팀장님, 제가 돌아오면 대답해주세요. 아시겠죠?’

무엇을 어떻게 대답하면 되었던 걸까. 지금 물어보면, 그는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있을까?

잠시 펜던트를 바라보던 양서호는 다시 그것을 거칠게 주머니 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양서호가 떠난 집안.
아까와는 달리 적막이 가득한 넓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나는 마구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미치겠네, 진짜.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해?”

양서호와 김신화의 두근두근 동거 라이프? 이런 걸 궁금해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나는 가면 위를 매만지며 신음 섞인 숨을 내뱉었다.

자,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궁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저 자식은 양서호와 동거를 하고 있는 거야? [양서호의 부하] 김신화는 뭐야, 갑자기 튀어나온 설정은 또 뭐고? 쟤, 원래 국가 공적 마법사 아니었어? 굶주린 저택에서 오매불망 기다리던 식구들과, 목숨처럼 아끼던 가면 컬렉션은 다 어디에 내팽개친 거냐고?

좋아, 그 모든 의문에 대한 대답을 한마디로 요약해 주겠다.

‘끔찍한 개자식이었던 내가 깨어나 보니, 외국인관리청 1팀 공무원이자 구국의 영웅이었고—인류 최강 약혼자와 동거 중이라고요!?’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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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깨어나자마자 양서호를 마주친 사람의 반응은 보통 어떨까?
일단 정신을 잃었다가 양서호 앞에서 깨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위험한 상황이다.높은 확률로 당신은 양서호에게 기절당한 상태(높은 확률로 사지의 붕괴를 동반)다. 기억이 없더라도, '아, 내가 뭔가 잘못했구나'라고 판단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렇기에 나를 내려다보는 양서호에게 가장 먼저 하려던 말은 이것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내가 끔찍한 개자식 대신 사과할게.”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옹알이에 가까웠다.
약물이 주입되고 있는 건지, 근육이 풀려서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입, 팔다리, 심지어 고개까지도 전부 박제되듯 고정된 몸.
정신을 잃었을 때를 대비해 구축해 둔 방어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아니면 애초에 양서호에게 끔찍하게 유린당한 끝에 발동조차 못한 걸까?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거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사고는 둔탁하고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정부가 위험한 외국인과 그 밖의 존재들을 감금하는 곳. 나는 텅 빈 방 중앙에 혼자 놓여 있었고, 투명한 유리창 너머, 벽 너머엔 양서호가 있었다.

문이 열리고, 양서호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나를 분쇄하러 오는 걸까? 벗어나야 해.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내 안의 마력이 반응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방금 뭐 하려고 했어?“

양서호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마법이 발동하지 않았어.’

이곳에 마법을 무효화하는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구속구나 항마 술식도 없다. 마법사를 구속한 장소라고 보기엔 뭔가 이상하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건—

‘마력 부족으로 인한 시전 취소 같은 건데.’

‘부족’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 소모된 게 아니라,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다. 김신화라는 존재가 마력이 넘쳐서 마정석이 되는 인물이란 걸 감안하면, 이건 매우 이상한 일이다.

‘어째서지?’

결론은 간단했다. 지금의 나는, 이 몸은—

‘마법사가 아니야.’

이성 판정을 해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실.
마법사가 아닌 김신화? 그게 무슨 팥 없는 찐빵, 크툴루 없는 크툴루 월드야?
아티팩트? 점멸? 회피? 도술? 모든 게 묶여 있다.
나는 무력하게 양서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터벅, 터벅, 터벅.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양서호.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던 그 순간—
딸깍, 하고 옆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몸 안을 맴돌던 이물감이 사라졌다.

“이제 괜찮을 거다. 담당자가, 약기운이 한동안 남아서 사고가 둔할 수도 있다고 하긴 했는데… 지금 누나 말은 알아듣고 있지, 신화야?”

나는 몸을 버둥거렸다.
누나! 내가 대답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대답할 수가 없어!
양서호는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고개를 고정하고 있던 쇠를 손으로 쥐어 부수고, 입에 물린 재갈을 뜯어냈다.
나는 즉시,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었다.
양서호는 만족스러운 듯 허리에 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좋아. 네가 왜 여기 있는지는 알고 있겠지.”

나는 혀를 바로 움직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니… 모르겠는데.”
“뭐?”

양서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식간에 퍼져나오는 살기.
몸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곧, [심연의 광기]가 발동할 것이다.
그러면 괜찮을—

‘…왜 발동을 안 해?’

야, 니알라, 일 안 하냐? 파지직— 안 하냐고?
젠장. 마법도 그렇고, 심연의 광기도 그렇고. 전부 고장났잖아.
다행히도,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기기 전에 양서호는 위압을 거두었다.

“하— 그놈들은 내 부하한테 대체 무슨 개짓거리를 해 놓은 거야.”

양서호는 혀를 찼다.
잠깐만. 방금… 무시할 수 없는 말이 지나간 것 같은데. ‘내 부하’?

“언제부터 내가 누나 부하였어?”
“너, 무슨 말을….”

나는 양서호가 ‘지금부터’ 같은 말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더 일그러져 있었다. [감정 표현: 충격]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할 정도로.

양서호는 설명 대신, 자신이 들어온 방 문을 걷어차 날려버리고 나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방 안의 인원은 두 배로 늘어났다. 그녀의 손에 들린 이는 심문을 담당하는 공무원이었고, 팔에 매달린 이는—

‘뭐야. 신우진?’

160cm쯤 되는 키. 산발에 가까운 머리. 익숙한 실루엣. 그리고 무엇보다, 양서호에게 저렇게 굴 수 있다는 점까지.

‘진짜 신우진이라고? 죽은 거 아니었어?’
“팀장님 그만해! 위에서 무슨 소리 들을 줄 알고!”
“우진아, 이거 놔라. 이 자식이 내 팀원의 기억을 건드려?”
“살, 살려, 살려주세요—!”

유리벽 너머에서 혼돈이 펼쳐지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양서호를 말리는 신우진,
졸도 직전의 공무원,
그리고 진심으로 분노에 휩싸인 양서호.

“잠깐만, 누나!”
“누나?”

신우진이 내 말에 반응해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양서호를 불렀다.

“누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은 해줘야지!”
“설명? 설명 좋지.”

양서호가 손아귀의 힘을 풀자, 불쌍한 공무원이 바닥에 떨어졌다.

“잘 들어, 김신화. 너는 현재 ‘공무 수행 중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천안을 파괴하고, 현장에서 작전 수행 중이던 인원들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상태다. 여기까지 기억나는 건 있어?”
“…아니. 아무것도 모르겠어.”

공무 수행? 천안을 파괴? 작전 수행 중인 인원 살해?
뒤의 두 개는 그렇다 쳐도, 앞의 건 아무리 봐도 김신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양서호에게 한 대답과는 다르게, 나는 이 상황을 어디선가 겪은 기억이 있다.
왜 내가 여기에 구속되어 있는지, 천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대략적으론 알고 있지.
물론, 나는 공이수가 아니다. 다만 ‘내가 이미 해봤다’고 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다.

‘크툴루 월드 222회차쯤에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이지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내가 외국인 관리청 1팀 루트를 뚫기 위해 도전하던 시절.
그 당시 외국인 관리청 루트는 거의 사장된 상태였다. 그 이유는 하나—
전부 양서호 때문이었다.

플레이어가 외국인 관리청에 입사하는 순간부터 게임은 망가진다. 양서호와 엮이는 즉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버그, 루프에 빠지는 메인 이벤트, 버벅거리는 시나리오. 나는 어떻게든 그 버그들을 피해 엔딩을 보겠다며 이를 갈고 있었지.

그렇게 T의 시계가 거의 다 차오르던 시점, 결국 엔딩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던 회차가 바로 222회차였다. 하지만 게임이 갑자기 강제 종료되더니, 접속해보니 멋대로 [외다리 주석 병정]이라는 엔딩이 달성돼 있었다.
로그를 확인해보니 김신화222와 양서호의 데이터가 합쳐진 이상한 결과값만 남아 있었다.

‘아마 버그였겠지.’

그 회차에서 해금된 아이템도 하나 있었는데, 쓸모가 없어서 몇 번 얻어본 뒤로는 방치했다. 그 이후로는 외국인 관리청 루트 자체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때 키운 캐릭터는 마법사가 아니라 무용수 콘셉트의 무투가였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김신화 222]라고?’

황당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내가 크툴루 월드에 떨어진 것과, 내가 이미 엔딩을 본 캐릭터가 되었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김신화1789가 김신화222가 되는 중간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로 기억이 비어 있다.

‘지능 스탯의 영향도 있겠지. 김신화222는 마법사가 아니었으니까.’

지금 이 몸의 기본 스탯과 특성은 확실히 김신화222에 가깝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단순히 몸을 갈아끼웠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스탯이 바뀌는 건 말이 안 된다.

“정말로 기억을 잃었다고…?”

신우진은 복잡한 감정이 섞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찡그린 것 같기도 했고,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슬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쟤는 또 왜 저래? 혹시 나랑 깊은 사이였어?

양서호는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멱살을 머리통을 깨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팀장님, 길어질 것 같은데 이만 저 녀석을 데리고 나가자. 여기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도….”
“그래. 그러는 게 맞겠지.”
“그럼 관사로 가는 거야? 그런데 이 녀석의 관사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몸이 허공으로 들렸다.
어라, 잠깐만. 누나?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관사로 데려간다. 혼자 두면 대체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겠군.”

양서호는 내 내면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집에 가자, 신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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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ok. 정장 ok. 넥타이 ok. 명찰 ok. 마지막으로 가면 ok.
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는 내가 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 정장, 목에 걸린 푸른 넥타이, 목에 걸린 태극이 새겨진 카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얼굴 위를 덮은 무채색의 고양이 가면.

"외출에 가면은 중요한 요소지.“

나는 가면의 이마 부분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린 뒤 화장실을 나섰다. 보이는 것은 단란한 집의 풍경. 2~3인 정도가 살기에 적합해 보이는 넓은 평수와 곳곳에 배치된 무개성한 가구들. 누군가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 사이사이로 집주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몇몇 소품들이 놓여 있었다. 귀여운 모양의 시계, 먹다 남은 사탕 봉지, 털이 달린 실내화, 부서진 채 구석진 곳에 보이지 않게 방치당한 가구였던 목재. 그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감시를 위한 수식과 도구들.

이곳은 세종시 외국인 관리청에서 제공하는 관사다. 기괴하게 발전한 이 세계에 걸맞지 않은 평범한 외관. 현실의 아파트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깨어난 이후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이곳에서 양서호와 단둘이 살고 있다. [김신화 222]가 원래 살던 집에 있던 물건들은 전부 빼내졌다. 모두가 김신화가 죽거나 영원히 공무원으로 일할 수 없게 될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게 버려질 뻔한 물건들을 보관해준 것이 양서호다.

-“한동안은 여기서 살아.”

김신화가 천안에서 벌인 참사는 천안을 점거했던 사교도들과 싸우던 도중 광기로 인해 발작한 결과였다. 뱀 인간들의 조치로 기억을 잃고 ■■(대체어: 정화)된 결과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기억상실에 걸린 데다 이상한 가면 집착증도 얻었다. 이 정도야 외국인 관리청 평균이라곤 하지만 언제 다시 폭주해서 세종시에 위협을 끼칠지 모른다. 이 사실로 인해 김신화는 지금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언제든 제거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나선 것이 양서호. 양서호는 정신 이상자의 감시 그리고 부하를 보호하는 일을 함께 떠맡은 것이다.
[심연의 광기]가 없는 이상 양서호로 인해 착란에 빠지는 편이 더 위험하다 생각해서 나는 거절했지만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넌 면역이니까 괜찮아.”

내가 기억하는 한 김신화에게 양서호의 위협을 막을 만한 공포 면역은 없었기에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더니…

-“글쎄. 나한테 많이 맞아서인가?”

그러면 양서호에게 많이 맞은 사교도들은 다 양서호 공포 면역이야 백신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양서호의 말대로 나는 양서호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심연의 광기]가 작동하는 것과는 다른 방면으로 양서호에 대한 공포가 차단되고 있다. 이런 효과를 낼 만한 특성 조합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김신화에게 그런 게 달려 있었나 특성을 직관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이렇게 불편할 줄이야.

그러나 나를 정말로 불편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공무원-김신화 자식. 대체 왜 이렇게까지 서호 누나랑 거리감이 가까웠던 거야?’

들어보니 김신화는 과거에 졸졸 따라다니며 양서호에게 엉겼다고 하지 않은가. 단 음료를 대령해 놓는다던가 옷을 정돈해준다던가 추울 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핫팩을 가져다 놓고 그러고선 팀장님~ 하고 애교를 부렸다는 증언이 있었지.

‘솔직히 여우짓 하는 것 같아서 싫었어요…. 근데 지금은 대놓고 여우 같아서 싫어.’
‘요즘 팀장님의 집에서 살고 있다고? 다가오지 마 1팀의 공적 자식.’
‘왜 팀장님은 이런 녀석을 좋아하시는 거야. 예쁘장하게 생겼으면 다야?’

…1팀 팀원들의 증언은 제쳐두자. 적어도 친한 부하 직원 포지션 정도는 됐던 것 같다.

-“누나. 칫솔 하나만 새로 꺼내줘.”
-“거기 꽂혀 있는 게 네 거야.”
-“음? 내 짐에 있던 거 꺼내 놔준 거야?”
-“아니? 원래 있던 건데.”

친한 사이면 자주 집에 놀러 왔을 수 있지. 둘 다 관사에 사니까.

-“여기 걸려 있는 그림은 뭐야?”
-“신화 네가 예전에 그려준 거.”
친한 사이면 그림도 선물해줬을 수 있지.
-“신화 너는….”
-“나는?”
-“항상 핫초코를 타줬지. 네가 타주는 건 뭔가 다르더라.”

핫초코도 타줄 수 있지. 그렇지. … … …

‘김신화 이 여우 새끼. 감히 누나한테 꼬리를 쳐?’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잊는지 자연스럽게 본인의 옷을 넘긴다거나 나는 모르는 무언가를 요구했다가 실망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대체 왜 전남친과 경쟁하는 현남친 같은 기분을 느껴야 하는데 누나의 약혼자는 나거든?

관사를 둘러본 뒤 불을 끄고 옷걸이에 걸려 있던 도포 자락을 잡아채 몸에 두른 채 집을 나섰다.

"오늘도 행복한 출근 시간이군.“

얼마 전부터 나는 1팀에 복귀해 공무원 일을 맡게 되었다. 내가 크툴루 월드에 와서 출근 같은 성실한 짓을 하게 될 줄이야.
주차장에 서 있는 차량은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이 세계의 공무원들은 출장 잔업 야근이 일상인 직종이다. 특히 심연의 존재로부터 국가의 안보를 지키는 부서라면 말할 것도 없다. 저 차들의 주인도 어제 돌아오지 못했거나 여전히 출장을 다니고 있겠지.

가면 너머로 스며드는 상쾌한 공기.따사로운 햇살.
그리고 길을 지나며 내 목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인사하는 시민들.
[가면]에서 오는 패널티 [공무원증]과 [세종시 인구의 성향]으로 인한 가산점.
모두가 나에게 호의적이다.
네네, 안녕하세요 시민 여러분.
제가 바로 파괴마 김신화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을 지키는 공무원이죠.

걸으며 바라보는 세종시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이 세계에는 김신화가 마스커레이드를 폭파한 일도 나무를 일으켜 건물 붕괴를 막은 일도 없다. 이곳의 김신화는 세종시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파괴마도, 만찬의 제물도 아닌 사람.

‘돌아가야 해.’

이곳은 내가 머무를 곳이 아니다.
나는 서호 누나의 약혼자지 양서호 팀장님의 부하가 아니다. 서호 누나에게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그 이유였다. 양서호를 ‘팀장님’이라 부르던 이 세계의 김신화와 나를 구분하기 위해.
몸에 두른 도포도 얼굴에 쓴 가면도 모두 그 일환이었다.

나는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이곳의 서호 누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 매일같이 그 사실을 되새기고 있다.
그럼에도 점점 더 이 결심에 저항이 생긴다.

‘침식되고 있는 거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김신화 222와 나의 경계가 흐려진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감정의 잔재는 남아 있다. 양서호와 함께하고 싶어하는 김신화 222와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만찬의 제물 김신화가 하나로 융합되어 간다.

결국 이것도 심연이 김신화를 무너뜨리기 위해 준비한 이벤트일 것이다. 여기에서 계속 머물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이 바로 엔딩이다. 이곳에선 집에 돌아가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이럴 때 다른 인격들이라도 있었다면 공무원 김신화와 나를 구분해줬을 텐데.’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들어온 나는 거울 앞에 선 김신화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여기서 나가는 게 서호 누나를 위한 일이야.”

그러니까 협조 좀 하자. 알았지?

“혹시 상담 예약 방법을 모르는 거라면 내가 예약해줄 수도 있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뒤돌아보자 신우진이 나를 미친 놈을 보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님.”

참고로 내가 신우진을 이렇게 부르기까지는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다.

-“원래 제가 뭐라고 불렀죠 선배님인가?”
-“…”
-“신우진 씨 우진 선배 우진아?”
-“…”
-“음 아니면 우진삐?”
-“너는 대체 뭐가 문제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미친 거 아닙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치료는 제때 받아.”

신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무언가를 던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았다. 이런 반응 속도와 운동신경도 원래 김신화에겐 없었던 것이다.

손 안이 알루미늄 캔 표면의 이슬로 축축해졌다. 포장지에는 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감귤 주스였다.

“그거 좋아하잖아.”
“제가요?”
“먹어보던가. 여기선 말고.”

신우진은 자신의 뒤쪽을 가리키며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무슨 용건일까. 적어도 팀에 적응하지 못한 후배를 향한 따뜻한 위로는 아닐 것이다.
나는 미묘한 경계심을 유지한 채 그를 따라 화장실을 나섰다.

*

그와 내가 도착한 곳은 옥상이었다.
나는 손에 들린 캔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뚜껑을 땄다. 이런 혈당을 올리는 음료수는 한동안 먹어본 적이 없는데 역시 건강이야말로 권력이군. 가면을 살짝 들어 음료를 머금자 달달하고 상큼한 감귤의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맛있네요.”
“그렇지?”

신우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심히 말했다.
내 취향을 잘 알던 사이같이 구는군. 한 달간 신우진의 은근한 텃세와 눈치 탓에 꽤나 피곤했던 걸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절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신우진은 피곤한 낯빛으로 옥상 난간에 등을 기대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다지. 동료로선 나쁘지 않게 생각해. 그리고…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팀장님을 위한 선택을 내릴 거라고 생각하니까.”

“아하. 그러고 보니 절 선처해달라고 해주신 게 선배님이라고 하셨었죠.”

김신화가 구속된 이후 김신화의 처리에 대해선 많은 말이 오갔다고 한다.
김신화는 플레이어로서 양서호만큼이나 수많은 업적을 세워왔다. 현재 대방벽을 대신해 세종시를 지키고 있는 방벽을 세우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지.
위험분자니 처리하자는 파, 대한민국에 기여한 바와 앞으로 기여할 바를 보아 살려주자는 파.
신우진은 천안에서 김신화를 목격하고 수습한 당사자로서 의견을 냈다고 한다.

“그래. 천안에서 폭주한 너를 보며 생각했어. 너라면 팀장님을 위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뱀인간들의 수족이자 양서호의 오래된 심복인 신우진이 생각하는 ‘양서호를 위한 올바른 판단’이란 무엇일까.
폭주한 나를 보며 양서호를 생각했다? 나를 양서호라고 착각하는 정신나간 사고회로를 가진 게 아니라면 김신화가 폭주 당시 무언가를 했다는 거겠지.
하지만 현장에 양서호는 없었다.

‘…서호 누나가 오지 않은 것 자체가 김신화가 한 일이었다?’

나는 신우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마법이 있었다면 비밀 이야기를 하기 더 편했겠지만 비밀(물리)을 시전할 수밖에 없군.
작은 목소리로 전달되는 속삭임.

“제 폭주는 서호 누나를 겨냥한 수작이었군요?”

신우진의 눈이 놀란 듯 약간 뜨였다가 미심쩍은 걸 보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정말로 기억을 잃은 거 맞지?”
“뭐 누나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답은 어느 정도 나오죠.”

아마도 김신화를 폭주시킨 놈들은 내가 양서호를 끌어들이길 바랐을 거다. 그리고 양서호가 김신화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길 바랐겠지. 너무 자주 본 시나리오라 장현덕도 예측 가능할 정도.

‘하지만 그건 뱀인간과 뱀인간들의 적대 세력 모두 짤 수 있는 계획이지.’

양서호의 주변인을 치우거나 양서호의 멘탈을 흔들거나. 누나가 그런 걸로 무너지거나 바뀔 인간도 아닌데 다들 누나를 모른단 말이지.
게임에서 이 시기쯤 왔을 때는 버그로 인해 스토리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정확한 진실은 모르는 상태.

‘어느 쪽이지?’

신우진은 내 어깨 위에 한 손을 올렸다.

“그 정도면 이미 알겠네. 팀장님에게 접근하지 마.”

어쩐지 굴러들어온 애첩에게 자리를 뺏긴 본처 같은 표독스러운 말투군.

“저를 질투한다고 해서 누나의 총애가 돌아오진 않는데?”

어깨를 쥐는 힘이 더욱 강해진다. 신우진은 양서호만큼은 아니라도 인간의 한계를 넘은 초인적인 힘의 소유자. 이 몸의 내구도가 높은 덕에 뼈가 부서지진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어깨를 못 쓰게 되었겠지.
그는 나를 자신 쪽으로 거칠게 끌어당겨 속삭였다.

“팀장님의 관사는 감시당하고 있어.”
“…?”
“뱀… 아니 정부는 팀장님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까운 사람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아. 그걸 과거의 너도 알고 있었지.”

이어진 뒷말은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그런데 과거의 너는 왜 그런 일을 한 걸까. 그렇게 되고 나선 자신이 한 짓을 후회했을까.”
“제 귀에 대고 영문모를 악담을 중얼거리시는 이유가 뭐죠?”
“악담이 아니야. 기억을 잃으면서 얻었던 교훈까지 전부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해 충고를 해주는 것뿐이지.”
“누나에게 접근하지 마라?”
“누나라는 칭호도 떼고.”

참 모순적인 말이군. 양서호에게 가까이 가는 걸 정부가 좋아하지 않으니 가까이 가지 마라?

“그럼 선배님은 뭡니까. 지금 누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는 선배님이잖아요?”
“나와 너는 달라. 너는 자신이 팀장님에게 구해지고 팀장님과 가까워지고 팀장님에게 소중한 존재가 됐다고 생각했겠지. 정작 팀장님을 구속하는 족쇄는 모른 채로.”
“그게 선배님과 나의 차이다?”
“그래.”

정말 별거 아닌 시시한 차이군. 솔직히 양서호의 설정에 대해선 어떤 면은 내가 신우진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신우진 반대로 네가 그렇기 때문에 나한테 지는 거야.”
“이 자식이….”

갑작스럽게 나를 강하게 밀치는 신우진. 그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눈알들이 데구르르 굴러가며 일제히 내 쪽을 바라본다.
명백히 적대적인 시선.

“이럴 수가. 이것조차도 키에엑 전개였다고?”
“너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었지!”
“아니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익숙한 전투태세를 취하며 신우진에게서 물러났다.
영문을 모르겠네. 방금까지의 대화 어디에서 이런 적대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심연의 존재에게 저 놈을 처리하라는 계시라도 받았나?

한 가지는 확실하군.
나를 처리하려 들었던 것은 사교도 따위가 아니라 이 나라의 정부라는 사실. 아마 신우진도 내 폭주에 어떤 관여를 했을 것이다.

나는 신우진을 이길 자신이 있지만, 여기서 싸움을 벌이는 건 완전히 나에게 불리한 짓이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김신화에 대한 평판은 내려가겠지.

‘젠장 마법만 있었어도 신우진 정도는 1초 만에 치워버릴 수 있는데.’

음. 내가 방금 마법이라고 했나
하긴 마법사들은 다들 이상한 촉수나 내장 같은 걸 날리니까. 그런 게 내게 있다면 신우진도 날려버릴 수 있긴 하겠지.

내가 정말로 청사 한복판에서 신우진에게 유리한 싸움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우리 둘 사이에 누군가가 떨어져 내리며 커다란 충격파가 바닥을 뒤흔들었다.
머리를 흩날리며 슈퍼 히어로 랜딩으로 착지하는 양서호.
그녀는 잠시 우리 둘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만으로 신우진과 나는 싸우다 선생님에게 현장을 들킨 사람들같이 움츠러들었다.

‘저거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지?’
“얘들아. 지금 싸워?”
“아니 그게 아니라. 잠시 감정이 격해진 것뿐이야.”

신우진은 당황했는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손사래를 쳤다.

“흠. 그래? 신화 너는 어때?”

내 쪽으로 돌아오는 양서호의 고개.

“선배님 말대로야 누나. 그냥 잠시 업무를 도와주다가 말다툼이 난 것뿐이야.”
“아쉽네. 싸울 거면 제대로 싸우라고 체육관에라도 보내려고 했는데.”

말리는 게 아니라?

“번복하고 싶으면 지금 말해. 이후에 업무에 지장을 주는 머저리 같은 짓을 하면 내가 한 대 쳐줄 테니까.”
“아니 난 절대로 선배님과 싸우고 싶지 않아!”
“나도 그래!”

싸우면 죽일 것 같이 굴고 있는데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양서호가 고개를 기울인다.

“잘됐네. 둘 다 안 싸우는 거지?”

나와 신우진은 열정적으로 긍정을 표시했다.
그녀는 살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내가 신화를 데려가도 되는 건가?”
“어 응. 물론이지 팀장님.”
“날 데리고 가서 이상한 짓을 할 셈이지 이것저것!”

누나가 저런 미소를 지을 때는 누나에게는 좋고 나에게는 좋지 않은 일만 있었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손을 크로스 하자 양서호는 상관없다는 듯 내 뒷덜미를 들어 올리고 난간으로 향했다.
상공에서 자유낙하하는 중력감이 나를 덮쳤다.

으아악 여러분 선량한 공무원이 사람을 납치하고 있어요 살려주세요!!!

*
[System: 화신 ‘얼굴 없는 자’가 고개를 기울입니다.]

방금 세상의 오점의 부하에게 한 그 말은 만찬의 제물이 말한 거임? 아니면 저 몸에 남아 있는 222번째가 말한 거임?

[System: 화신 ‘어둠에 깃드는 자’가 부정합니다.]

어머, 당연히 만찬의 제물이 말한 거죠. 지금 저 몸엔 만찬의 제물 한 명뿐이랍니다.
처음부터 그런 계약으로 세팅한 걸요?

[System: 화신 ‘얼굴 없는 자’가 의문을 표합니다.]

그러면 만찬의 제물이 동화되고 있다고 생각한 건 뭐임?

[System: 화신 ‘어둠에 깃드는 자’가 웃습니다.]

항상 그런 것처럼 다른 인격이라도 생겼나 보죠.
존재는 사라졌어도 사랑만큼은 남아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
과거의 자신에게 느끼는 질투, 연적을 향한 견제.
아아, 만찬의 제물이 선택을 내릴 날이 기대되네요.

[System: 화신 ‘얼굴 없는 자’가 걱정합니다.]
으음, 조금 걱정되는데. 이건 님이 진행하는 이벤트니까 별 말은 안 하겠음.
근데 만찬의 제물이 정말로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음?

[System: 화신 ‘어둠에 깃드는 자’가 기쁜 듯 웃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이미 한 번 같은 선택을 내렸잖아요?
저는 확신할 수 있어요.

만찬의 제물은 세상의 오점을 사랑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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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서호 누나가 날 데려간 이유는 업무상의 이유였다.
천안시와 맞닿은 방벽 근처에서 수상한 의식을 벌이는 사교도 집단을 조사하고 처리하라는 지극히 외국인 관리청다운 공무.
내가 거의 나설 일은 없었지만 우리는 사교도들을 제압해둔 채 세종시 방벽 위에 올라와 있었다.

마치 성벽처럼 세종시의 경계선을 따라 길게 늘어선 벽은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는 것보다는 세종시를 가두려는 것처럼 보였다.
세종시에 이런 걸 세우려면 하루이틀만에 될 일은 아닐 텐데 뱀 인간들의 아버지의 가호라도 받았던 걸까?

“깨어난 후에 여기까지 오는 건 처음이겠군.”

내가 크툴루 월드다운 광경에 빠져 있을 때 들려온 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은 양서호의 집과 청사 근처만을 오갔기에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다. 대방벽이면 몰라도 세종시에 세워지는 방벽을 보게 될 날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벽 근처는 군사 시설에 가까운 살벌한 분위기를 풍겼다. 공무원 복과 군복을 입은 인원들이 섞여 경계를 서고 있었고 벽을 겨누는 군용 장비들이 늘어서 있다.

“뭔가 많네.”
“그래. 여기가 수도의 최종 보루선 중 하나니까.”

천안 쪽을 내려다보는 양서호의 얼굴은 불만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곤 썩 마음에 들어하진 않는 것 같은데 누나.”
“흥, 이걸 세종시에만 지었다는 건 다른 곳은 정말로 버리겠다는 뜻이야. 거기다 천안에서의 작전이 실패했으니 한동안은 정부도 보수적으로 나오겠지.”

양서호는 갑작스럽게 말을 멈추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눈치를 보듯 약간 어색한 표정.

“이걸 지은 것도 네 공 중 하나였지. 네가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것도 그래서였고.”

겨우 외국인 관리청 공무원이 실행하기엔 대단한 업적이긴 하다.

‘대체 어떻게 했던 거지?’

분명 뭔갈 했던 것 같은데 공략법이 기억나질 않는다. 뭐 이제 와서 중요한 건 아니겠지.

“누나는 가끔 신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음, 그것도 내 매력이지. 요즘은 미스터리어스한 남자가 유행이라더라.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 넌 자주 여길 벗어나고 싶다고 했었지. 공무원엔 안 맞는 체질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공무원 감은 아니긴 하지.”
“세종시도 싫다고 했었지.”
“내가 그런 말을 했어?”
“했어. 그런데 결국엔 세종시만을 지키는 벽을 만들었군.”

과거의 나의 생각을 잘 알진 못한다. 정말로 ‘나’였다면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겠지만 나와는 상황도 여건도 모두 달랐겠지.일단 만찬의 제물도 아니었을 거고.
나는 가면 위를 긁적였다.

“어렵게 생각할 건 없지 않을까? 세종시를 지키고 싶어진 거 아니야?”
“지키고 싶어졌단 건 뭔가를 포기했다는 거야.”

아무래도 서호 누나는 ‘내’가 변했다는 점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과거의 나에게 안 물어봤어?”
“물어볼 필요성을 못 느꼈으니까. 네가 공무원 업무에 만족한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네가 기억을 잃고 나니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오히려 궁금해지더군.”
“그럼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결과적으로 세종시는 안전하고 나도 돌아왔고 공무원 생활이 익숙하진 않지만 적응하고 있어.”
“적응? 우진이와는 항상 싸우고 다니던데.”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험담을 얹었다.

“그건 신우진이 쪼잔한 거고. 아무튼 최근에 나는 만족하고 있어. 누나와 함께하는 생활도 즐겁고. 과거의 나도 이런 기분이었던 거 아닐까?”
“그래?”
“응. 그러는 누나는 나랑 함께 지내는 게 어땠는데?”

양서호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눈을 깜빡였다.

“나는….”

시시각각으로 표정이 변한다. 지난 한 달을 떠올리는 걸까?
이윽고 내쉬어지는 기나긴 한숨.

“이런 건 처음이어서 잘 모르겠어. 직장이면 몰라도 한 집에서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건 신경을 많이 써야 하더군. 예를 들면….”

양서호는 내 가면 위로 툭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하, 이젠 피하지도 않아?”
“내 머리를 터뜨리려고 했던 건 아니잖아?”
“네가 이런 태도라 더 신경 쓸 일이 많았던 거야. 보통은 내가 이러면 알아서 피하니까.”

그렇게까지 경계심 없이 굴었다는 자각은 없는데 양서호 입장에선 조금만 쳐도 죽어버리는 놈이 계속 경계심도 없이 얼쩡거리는 꼴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신기할 정도로 양서호에게 공포를 느끼는 일이 없었긴 했지.

“그래도 싫진 않았지?”
“하… 얼굴 좀 들이밀지 말고 비켜. 들이밀 거면 가면이라도 벗던가.”
“어라? 혹시 내 얼굴이라면 들이밀어도 괜찮다는 소리? 얼굴이 마음에 든다?”
“누나가 생각하기에 네 장점은 얼굴뿐인 것 같거든?”

질린 표정을 짓는 양서호라니 완전 레어 광경이다. 나는 딱히 내 얼굴에 대해 큰 감상을 품고 있진 않고 오히려 싫기까지 하지만….

“누나가 마음에 들어하면 벗고 다닐게.”
“뭐야. 그거 벗을 수 있는 거였어? 얼마 전까진 벗기려고 하면….”
“내가 그랬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누나가 원하면 가면 정도야 벗을 수 있지.”

미간을 깊게 좁힌 양서호가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본다. 앗, 벗으라는 말은 결국 안 하는 건가? 매력 수치엔 자신이 있는데.

“그래서 네 주장은 과거의 김신화도 너와 똑같은 심정이었을 거다?”
“기억은 없어도 김신화라는 점은 동일하잖아.”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자.”
“뭐든 물어봐. 이래뵈도 내가 김신화 박사님이거든?”

양서호는 잠시 고민하는 듯이 한 손으로 머리께를 꾹꾹 눌렀다. 양서호 자신에게만 시전 가능한 행동.
자, 빨리 물어봐. 얼마든지 대답해줄게 누나. 완벽히 비슷한 답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공감에 입각한 90% 유사한 답을 내어주지.

“네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했던 건 뭐야?”

…뭐?
순간 머릿속이 멍해진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었지?

“내가 누나한테 좋아한다고 했다고? 언제?”
“네가 천안에 가기 전에. 그리고 다녀온 뒤에 답을 들려달라고 했지.

대사가 사망 플래그 덩어리인 건 둘째치고…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의미에서의 ‘좋아한다’였다면 답을 들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겠지?

“그거 고백이었어?”

양서호의 눈이 내 눈동자를 직시하려 시도하듯 흔들리다, 이윽고 포기했는지 가면에 안정적으로 시선이 안착했다.

식은땀이 등뒤를 타고 흘러내린다. 김신화 이 자식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야? 설마 신우진이 말했던 ‘과거의 너는 왜 그런 일을 한 걸까’에서 그런 일이 고백이었다고?
그리고 한편으로 드는 생각.

‘서호 누나 성격에 지금 이렇게 묻는다는 건 그 고백에 긍정적이라는 건가?’

김신화가 양서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양서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자기한테 고백한 놈이 기억을 잃고 같은 집에 살면서 희희덕거리는 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애써 침착하게 변명했다.

“글쎄, 어쩌면 인간적인 좋아함을 표현하고 싶은 거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도 같이 줬지.”

양서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하트 모양의 주석 팬던트를 꺼내들었다.
하트 모양 목걸이? 이건 너무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잖아. 김신화 이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해버린 거야?

“대답해 봐. 신화야. 참고로 누나가 너를 안 때리는 건 네가 예뻐서가 아니라 네가 아직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서 그래. 때리면 더 이상해질까 봐.”

살벌한 음성. 무어라 대답해도 외통수가 되는 상황이다.
이봐 김신화. 나는 연애 이벤트는 진행 안 하는 주의야. 좀 주의해줬어야지.

‘그럼 어쩔 건데. 고백 취소할 거야?’

이제 와서 기억을 잃었으니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할 건가?
김신화가 양서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었지. 결국 그건 과거의 김신화일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누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양서호는 멋진 사람이다.
외국인 관리청 특수 1팀의 팀장으로서의 양서호? 완벽하지. 양서호만큼 팀장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안보를 위협하는 외국인을 막아내고 국민을 지킨다. 양서호에겐 그것을 해낼 힘이 차고 넘칠 정도로 있었다. 통솔력? 1팀의 인원들은 대부분 양서호를 존경하는 이들이다. 대부분의 일에서 양서호의 판단을 믿고 따르는 이들.

그렇다면 사람으로서의 양서호?

‘강해.’

물리적인 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양서호는 강하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 자신을 조종하려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관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양서호의 인간적인 결점을 말하라면 한 트럭은 쌓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에겐 일반적인 사람이 가진 많은 것이 결여되어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그게 뭐?’

누나의 앞에 그런 것을 들이밀면 일단 어느 정도는 고개를 끄덕일 거다. 그리고 날려버리겠지. 그 결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양서호는 이미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단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그 견고한 건실함이 내 지표였다. 나 또한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으니까.」

나와 양서호는 심연의 존재에게 이 세상에게 많은 걸 빼앗겼다. 그 결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양서호를 믿고 있다. 내가 터무니없는 짓을 벌일 때 양서호도 같이 터무니없는 일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힘이 뻗어나가는 방향은 세상의 파괴가 아닌 수호일 것이라고.

‘나는 파괴마라고 불리지만 서호 누나는 내 적이 아니야.’

오히려 서호 누나가 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거다.
말했잖아? 서호 누나는 내 약혼자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다.
그리고 약혼자는 동료로 판정되지.

「함께 있고 싶어.」

이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걸까?
양서호는 지금 뭘 바라고 있는 거지?
내가 대답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 생각이지?

‘고백을 받아주는 건가?’

원래의 양서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내가 정말로 양서호에게 고백을 한다고 해도 양서호는 귓등으로 흘려넘길 것이다. ‘그래? 아무튼 한 대 맞자.’ 같은 말을 돌려주겠지.
그것은 파괴마 김신화와 양서호의 관계다.

공무원 김신화와 양서호는 다르다.김신화는 양서호의 부하다. 양서호에게 구해졌고 양서호와 밀접한 관계를 쌓아왔다. 신우진만큼은 아니지만 양서호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면 함께할 수 있는 건가? 마음껏 춤을 출 수 있는 건가? 내 앞에서 팬던트가 흔들린다. 매끈한 줄 알았던 팬던트의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음각이 새겨져 있다.
병정과 발레리나의 그림이다.
둘은 함께 춤을 추고 있다.
그래, 영원히 함께 춤을 추는 거다.
이 장난감 성벽 안에서.
지금까지와 같은 만족스러운 나날을 이어가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영원히.
홀린 듯이 팬던트 위로 손을 뻗는다.
그래, 이 팬던트만 있으면.

[System: 전용특성 ‘심연의 광기’가 활성화됩니다.]

파지직, 하고 머리 근처에 튀는 푸른색의 스파크.
나는 반사적으로 팬던트에서 멀어졌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잠시 정신이 맑게 개이는 듯한 감각.

‘…방금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지?’

만족스럽다고? 이 생활이?
나는 걸음을 주춤, 하고 뒤로 물렸다.

‘그래. 만족스러워. 나는 누나와 함께 춤을 추고 싶어.’

잠깐, 이게 정말 내 생각인가?
춤을 추고 싶다고? 왜? 갑자기 브레이킹 댄스라도 춰서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어진 거야?

‘잊어버린 거야? 나는 무도가잖아.’

내 빌드는 춤을 추는 컨셉으로 이루어져 있다. 춤을 추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무예이자 의식으로 취급된다. 이런 류의 예술에 조예가 깊진 않았으나 이 빌드를 직접 실현하면서부터 나는 전문 무용수에 견주는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림도 무용도 마법도 결국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같다.

‘뭔가 이상해.’

이상하지 않아.

‘저 팬던트는 뭐지? 왠지 익숙한데. 어디서 본 거지?’

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 팀장님에게 선물하기 위하여.

“팀장님. 혹시 그것 좀 잠시 살펴볼 수 있을까?”

양서호는 미심쩍은 표정을 하면서 나를 노려본다.

“혹시 증거를 인멸하려는 셈은 아니겠지?”

나는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하긴, 방금까지 내가 회피하려고 했던 것은 양서호도 인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는 하지 않을 테지.
김신화는 이미 깨달았다.
깨달아버리면 돌아갈 수 없다.

“그럴리가.”

그리고 내 손안에 들어오는 팬던트.

[System: 당신은 과거의 흔적과 마주했습니다.
한때 당신과 양서호는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이었으나 세상은 결코 두 사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끝없는 시련 앞에서 당신은 결국 그와 떨어지지 않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로 녹아내려 작고 초라한 주석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모든 흔적은 사라졌고 그 일은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지만
오직 하나, 목걸이만은 남았습니다.
당신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번에는 분명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병정과 함께 영원토록 춤출 수 있는 그 방법을 말입니다.]

*

[System: 화신 ‘얼굴 없는 자’가 묻습니다.]

오. 저게 이번에 관리자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는 그 팬던트임?

[System: 화신 ‘어둠에 깃드는 자’가 긍정합니다.]

바로 저것이 이 세계의 핵
그리고 세상의 오점과 만찬의 제물의 사랑의 증표랍니다

[System: 화신 ‘얼굴 없는 자’가 감탄합니다.]

그 골칫거리 오류를 사용해서 이런 이벤트를 만들다니 굉장한 아이디어였음
이 팬던트가 설정상 세상의 오점의 데이터와 만찬의 제물의 데이터 일부가 합쳐서 만들어졌다는 건 이해할 수 있음
근데 팬던트는 이미 있으니까 세상의 오점과 만찬의 제물을 합쳐야 모순과 오류가 해결된다는 게 말이나 됨?
그런 건 관리자도 안 좋아할 거임
하필이면 세상의 오점의 데이터가 섞여서 건드릴 수도 없으니 머리 아팠는데 정말 잘했음

[System: 화신 ‘어둠에 깃드는 자’가 불만을 표합니다.]

저는 그런 전개가 좋은데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나가 되는 건 아름다운 전개잖아요?

[System: 화신 ‘얼굴 없는 자’가 눈치를 보다 말합니다.]

…설마 관리자한테 이벤트를 그렇게 진행하겠다고 말한 거임?

[System: 화신 ‘어둠에 깃드는 자’가 부정합니다.]

그럴 리가요
그런 식으로 말해버리면 관리자가 허락해줄 리도 없고, 그랬다간 이 스테이지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고 말잖아요? 만찬의 제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합쳐진채 홀로 탈출해버리면 되니까요

전 이 아름다운 무대를 한껏 활용하고 싶어요
이 거짓으로 꾸며진 데이터 세계를 현실로 재현하여 자신의 사랑을 끄집어내고자 몸부림치는 만찬의 제물이 보고 싶답니다!
아아- 만찬의 제물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그 어떤 희생과 고난이라도 달콤한 미소로 견뎌내겠지요.

소중하게 여겼던 이들을 자신의 두 손으로 지워버리고, 마침내 사랑만이 오롯이 남아버리는 아름답고 잔혹한 모습!

[System: 화신 ‘얼굴 없는 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지금 전개라면 정말 님이 말하는 대로 될 수도 있을 것 같음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선결 조건이 있지 않음?
일단 세상의 오점이 만찬의 제물의 제안에 동의해야 함 팬던트는 만찬의 제물과 세상의 오점의 공동소유임
이건 어떻게 할 거임?
만찬의 제물도 그렇지만 세상의 오점도 만만치가 않음

[System: 화신 ‘어둠에 깃드는 자’가 비웃습니다.]

물론이죠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
세상의 오점이라면 만찬의 제물이 나라를 위협하는 순간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머금고 그를 베어내겠죠.
참으로 비극적이면서도 고귀한 선택이에요

하지만 만찬의 제물을 사랑하는 일이 곧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어떨까요
이 세계는 어디까지나 외부 스테이지. 만찬의 제물이 나가는 순간 막을 내리는 무대
하지만 팬던트와 만찬의 제물 그 둘이 함께한다면 이 세계가 계속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거예요.
더 길고- 더 아름답게.

세상의 오점은 사랑을 위해 만찬의 제물의 손을 잡을 거예요.
후훗.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의 오점은 더 이상 수호자가 아닌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이대는 침략자가 되겠죠.

*

[’광기-무도 집착증’이 발현합니다.]

김신화는 양서호를 사랑한다. 그 사랑 앞에서 김신화가 파괴마인지 공무원인지는 중요치 않다.
나는 깨닫는다. 이 팬던트야말로 세계의 핵이자 나를 구성하는 물질이다.

‘이 세계에 한정해선 심연의 부등다면체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거겠지.’

내 스탯을 강제하고 있던 것도 이것이다. 방금까지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심연의 마법사, 마법사왕, 파괴마, 끔찍한 개자식이니까.

빠르게 돌아가는 사고. 넘실거리는 마력. 허공으로 떠오르는 몸. 그런 내 몸을 감싸는 형형색색의 마법진들.

나는 팬던트를 들어 내 목에 걸었다.

나는 김신화 222와는 다르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며,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꼭 혼자일 필요는 없지 않나?’

눈앞에 이렇게 멋진 춤 상대가 있는데. 나는 양서호를 향해 손을 내민다.

“누나, 나랑 춤출래?”

너무 갑작스러웠나? 걱정하지 마. 분명 최고의 무도회가 될 거야. 가면은 못 벗겠지만, 대신 누나에게도 무도회에 어울리는 멋진 가면을 씌워줄게.
그렇게 양서호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파지지직—주변으로 새하얀 전자기장이 펼쳐진다.

[System: '위자드 킬러'가 발동합니다. 주변의 환경이 '저마력지대'로 전환됩니다.]

“팀장님, 그 자식에게서 떨어져!”

벽 아래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이쪽을 일제히 겨누고 있는 기관총, 미사일, 공무원들.
방벽 바깥쪽에서 부유하던 몸이 한순간에 중력의 힘에 끌려 추락하기 시작한다. 세종시의 방벽은 대방벽보다 두 배 높은 20m. 연약한 마법사 김신화에겐 떨어지자마자 죽을 수도 있는 가혹한 환경이다.

몸을 강제로 끌어내리는 중력. 위로 솟구치는 팬던트.
흠. 원래 마법소녀들은 다들 변신해서 위기를 벗어나기 마련이잖아?

나는 팬던트를 잡아챘다. [인식] 마법조차 쓸 수 없는 상황이지만, 자연스럽게 이것이 사용자에게 부여하는 능력을 알게 된다. 설명창을 볼 필요도 없이 체득되는 사용법.

나는 미끄러지듯 바닥에 착지했다.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먼지와 자갈이 폭발하듯 튀어 올르고, 쩌저적—하고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린다. 이것도 슈퍼 히어로 랜딩쯤으로 부를 수 있으려나? 본래의 김신화라면 할 수 없는 기예지만 지금의 나에겐 가뿐하지. 검은 도포 자락은 어느새 한쪽 어깨에 망토처럼 걸쳐져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흙먼지 속에서 나는 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양서호는 나를 내려다보며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다.

“내려올 생각이야, 누나?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마중 갈게.”

다리에 힘을 주어 바닥을 박찼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높게 솟구치는 몸. 나는 이제 20m나 되는 벽보다 더 위에 부유하고 있다.

-------------
5.

양서호는 이 일련의 사태가 당혹스러웠다.

‘저 자식은 왜 갑자기 맛이 간 거야?’

고백에 대해 물어봤을 뿐인데 갑자기 돌변해 팬던트를 달라고 하더니, 이젠 춤을 추자고 한다. 광기에 빠진 김신화조차 이 전개가 너무 황당해 걱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양서호는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팀장님, 혹시 같이 춤 추실래요?”

과거의 김신화는 그런 말을 뻔뻔하게 꺼냈다. 양서호와 함께 춤을 추다간 본인의 뼈가 산산조각 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양서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빈말은 하지 마. 어차피 너도 나를 두려워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잖아.

-“신체 접촉 없이도 듀엣은 가능해요.“
-”공무 중에 갑자기 춤을 추는 게 근무 태만인 건 둘째치고, 일단 나는 춤 못 춰. 배운 적도 없고.“
-”제가 알려드릴게요.“

김신화는 평소 무용의 형식을 차용한 무술을 쓰는 편이었고, 공연을 보러 가자며 양서호에게 티켓을 건넨 적도 있었다. 양서호의 인생에서 ‘춤’이란, 모두 ‘김신화’였다. 그렇게 많은 종류의 춤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그는 비슷한 제안을 몇 번이고 받았고, 그때마다 거절했다. 김신화는 잊을 만하면 다시 묻곤 했다.

‘춤을 못 춰서 한이 된 귀신이라도 들린 건가?’

팬던트를 건네준 날에도 김신화는 말했다.

-”팀장님. 같이 춤 추실래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춤 못 춘다니까? 1팀 다른 애들 데리고 동호회라도 만들던가.“

양서호는 김신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김신화는 갑작스레 미쳐버렸다. 그리고 외국인 관리청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적으로 규정했다.

떨어졌다가 다시 초인적인 힘으로 치솟는 김신화. 원래 저 정도의 힘을 가졌었나? 생각이 들었지만, 원래 사교도란 갑자기 힘을 받아 강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김신화는 사교도가 되어 심연의 존재에게 영혼을 판 것인가?

“누나, 지금 당황스럽지? 내 얘기를 들어줘.”

공중에 떠 있는 김신화를 향해 쇄도하는 양서호. 평소 김신화의 전력을 고려해 조절한 속도의 공격이었다. 그런데—

“어쭈? 피해?”

버거워했을 법한 공격을 유려한 춤사위로 피하는 김신화.

“얘기고 자시고… 야, 너네 지금 나 따돌려? 이게 대체 뭐야?”

양서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세종시에서 이북과 맞닿은 지점. 이상 상황에 대비해 설계된 공간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준비된 대응은 부자연스럽다.
게다가 원래 김신화는 마법의 마 자도 모르던, 그냥 이능력자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런데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위자드 킬러를 꺼내들었다.

‘김신화 이 자식한테 물어봐도 이상한 소리만 하겠고…’
“신우진! 빨리 설명해!”

벽 아래에서 신우진의 목소리가 터진다. 동시에 양서호가 있다는 건 고려하지 않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산탄. 그들도 양서호도 알고 있다. 이런 총알이 양서호를 상처입힐일은 없다.

“예언이 있었어! 김신화는 양서호를 이 세상에서 없애버릴 거라고!”
“우진아. 기상청마냥 빗나가는 엉터리 예언을 믿고 이 난리를 벌인 거야? 그것도 팀장인 내게는 아무런 얘기도 없이?”

양서호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1팀의 결정권자인 양서호에게는, 팀원에 관한 일이라면 반드시 전달되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는 진작에 김신화를 경계했을 것이다. 그리고 외국인 관리청 공무원답게 결단을 내렸겠지.
그 생각엔 아무 의심도 없었다. 신우진이 다음 말을 꺼내기 전까진.

“팀장님은 저 자식을 좋아하잖아!”

신우진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양서호는 말없이 멈췄다. 수많은 감정이 속에서 소용돌이친다.

내가? 김신화를?
부하로서야 좋아하지. 일도 잘하고, 호흡도 잘 맞고. 업무상으로도, 평소에도 함께 일하기 편한 동료였다.
하지만 신우진이 말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방금 전, 자신이 김신화에게 물었던 그것과 같은 감정이다.

“그래? 내가 신화를 좋아한다고?”
“그래!”

신우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언한다.
양서호는 부정, 긍정, 그 중간 어딘가에서 스스로의 감정을 되짚는다.

함께 있으면 즐겁고, 조금 더 같이 있고 싶고, 가끔 하는 짓에 웃음이 나온다. 그런 감정은… 세간이 말하는 ‘좋아한다’에 가깝지 않나?

나는 왜, 김신화가 한 말이 고백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물었지?
왜, 거절하지 않았지?

‘그렇군. 나는 김신화를 좋아했던 거였어.’

*

신우진은 이를 악물고 소리친다.
그 속에는, 그가 아닌 척 감추고 자신조차 부정했지만, 분명히 가지고 있던 강렬한 감정이 담겨 있다.

‘김신화가 싫다.’

김신화가 주제넘게 양서호에게 다가가거나 치근덕거리는 건 아무 상관도 없다. 지금까지 양서호에게 그런 식으로 군 놈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양서호는 김신화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게 문제였다.

‘팀장님이 그날 바로 김신화의 고백을 거절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어…!’

천안 작전이 펼쳐지기 이틀 전, 신우진은 김신화의 고백을 들었다. 양서호를 감시하던 뱀 인간들이 설치한 도청 술식에서 전달된 정보.
신우진은 그런 것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상부는 신우진에게 김신화를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이왕이면 양서호 자신이 직접 김신화를 죽이게 만들라고.

김신화에겐 [광기-무도 집착증]이 달려 있다. 잠재적인 것이었지만, 뱀 인간들은 신우진에게 그것을 끌어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양서호에게 집착하는 김신화의 광기가 발현된다면, 분명 양서호에게 달려들려 할 것이다.

신우진은 김신화의 광기를 자극했다.
하지만….

-“하하하-! 뱀 인간들과 네 목적은 진작 알고 있었어! 날 이용해서 팀장님의 기를 누를 생각이지? 겸사겸사 팀장님과 가까운 신우진, 너에게 경고도 하고.’

주변을 전부 파괴했으면서도, 사뭇 멀쩡한 모습으로 신우진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김신화.

-”미안하지만 팀장님은 그런 수작에 넘어가는 쉬운 사람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그것과는 별개로 넌 죽을 거야. 다른 건 부가적인 목적이야. 그들은 자신들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은 사람이 팀장님의 곁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죽이기 싫다.

-“들고 있는 그 전화기. 그걸로 팀장님을 부를 생각이지? 정말 멋진 아이디어야!”
-“그래. 나는 지금 팀장님을 부를 거야. 그리고 팀장님은 널 죽이겠지.“
-”나는 팀장님에게 달려들고? 뭐…그건 맞는 말이야. 나는 지금 팀장님과 함께 춤을 추고 싶거든.“

주위를 둘러보는 김신화.

-”이 광경을 봐. 나랑 춤을 추려던 사람들은 모두 새빨개졌어.“

신우진은 김신화를 따라 고개를 돌린다.
김신화에게 달려든 사교도, 심연의 괴물, 공무원. 그들은 모두 새빨간 고깃덩이가 되었거나 중상을 입고 기절했다. 그 폭풍 속에서, 신우진만이 그나마 멀쩡히 남아 있었다.
비단 양서호가 관련된 게 아니더라도, 이런 짓은 용납받을 수 없는 대참사다.

-”하지만 팀장님은 달라. 팀장님은 나와 춤을 춰줄 거야.“
-”네 춤에 대한 견해는 잘 들었어. 그걸 팀장님한테 말해.”

그리고, 휴대전화의 번호를 누르는 신우진의 떨리는 손.

-”하지 마.”
-”뭐?”
-”아이 참, 방금 내가 너무 작게 말했나? 부르지 말라고, 팀장님.”
-”이제 와서 팀장님에게 죽기 싫어졌다는 건가?”
-”아니. 춤이란 건 즐겁게 추는 거야. 이렇게 억지로 불러봐야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잖아?”

신우진에게 쇄도한 김신화는, 신우진의 손에 들려 있던 전화기만을 차서 날려버렸다.
파각하고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신호음이 울리던 전화기는 깨지고 침묵한다.

-”부숴도 소용없어. 이미 세종시 쪽에서 팀장님께 모든 사항을 전달했을 거야.”
-”신우진. 난 뱀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 없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둘 생각도 없고.

항상 날 질투했잖아?

-“내가 없어지면 팀장님 옆에는 너밖에 안 남을 텐데. 너는 그 옆에서 팀장님을 위로해주겠지? 그건 너무 남 좋은일 해주는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다.
정말 그런가?
신우진이 하려고 했던 일은 오로지 뱀 인간들의 명령 때문인가?
사실은 김신화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았나?
새삼스럽게 그 사실에 충격이라도 받은 건지, 신우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널 죽이고 싶어했다고?”
-”아니.”

고개를 젓는 김신화.

-”너는 날 죽이고 싶어하지 않아. 그냥 명령을 따라야 하는 군인 신분일 뿐이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편향적이라도.”

그게 뱀 인간들이 네게 주입한 신념이니까.

-”그래. 난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어!내가 한심해 보여? 그래도 이건 전부 나라를 위한 일이야!”

양서호가 김신화를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래서 연인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그래서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래서 나라를 향해 칼을 겨누게 된다면.

그땐 천안이 조금 부서지고 끝나는 정도가 아닐 거다.
뱀 인간들이 신우진에게 심어준, 그리고 신우진도 마음속 깊이 동의하고 있던 생각.
김신화가 양서호에게 고백했고 양서호가 그것을 온전히 거절하지 않은 시점에서 그건 더 이상 가능성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니, 죽어라.

-”알아. 나를 죽여.”
-”…?”
-”팀장님 말고 네가 해. 뱀 인간들도 너도, 항상 팀장님에게 떠넘기기만 하다니 너무 비겁하지 않나?”

김신화는 둥글게 눈가가 접히는,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난 팀장님을 위해서라면 내가 죽는 게 맞다고 생각해!”
신우진이 보아온 김신화는 악착같은 사람이었다. 수많은 사건사고에 휘말리며 무슨 일을 당해도,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다.
신우진은 가끔 김신화를 보며 감탄하곤 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김신화는 새로운 활로를 내놓곤 했다.
동료의 영웅적 행위에 감화되듯. 양서호와는 다른 방향으로, 김신화는 신우진이 의지하던 동료였다.

위에서 김신화를 죽이는 데 양서호를 불러오라는 말을 한 건, 비단 양서호를 통제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뱀 인간들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을 확실하게 처리해버리고 싶어했다.

김신화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죽으려 들지도 않을 거다. 양서호 정도가 아니면 안된다. 그것이 신우진의 믿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그 자신의 입으로 부정하고 있다. 신우진은 그 사실에서 강한 충격을 느꼈다.

-”하지만 팀장님에겐 어떨까. 나를 죽인 양서호는 여전히 성실한 공무원이겠지. 하지만 가끔씩 나를 생각할 거야. 맞아, 그런 녀석이 있었지? 내가 또 죽여버렸네? 수많은 죽음 위에 하나가 더해진 것뿐인데도, 팀장님은 괴로워할 거라고.”
-”네가 나보고 너를 죽이라고 하는 건, 팀장님을 위해서야?”
-”그래. 팀장님을 위해서야. 그리고 무엇보다….”

너도 나를 죽이면, 잠자리가 편친 않을 거잖아? 참고로 엿먹이려는거 맞아.

결국 신우진은 김신화를 죽이지 못했다. 양서호에게서 기억을 잃은 김신화를 떼어놓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그때 김신화를 죽여버렸어야 했다.
신우진은 김신화가 원망스러웠다.
너는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왜 내가 너를 죽이기 싫어할 거라고 말해서.
팀장님을 위해서라면 희생할 거라고 말해서.

신우진은 양서호가 원망스러웠다.
왜 그날 고백을 거절하지 않아서.
기억을 잃은 김신화를 맡겠다고 나서서.
신우진은 뱀인간들을 설득했다.
양서호에게 구해진 유대를 잃은 김신화는 금방 양서호를 무서워하게 될 것이다. 외국인이 된 부하를 죽이는 것보단, 김신화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 더 충격일 것이다.

그러나 뱀 인간들은 예언을 받았다.

‘김신화는 세종시를 멸망시키고 양서호를 없애버릴 거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김신화를 배제하길 바랐다.
양서호의 눈앞에서 바로.

이번에야말로 김신화는 죽을 것이다. 양서호가 그렇게 할 것이고, 만약 양서호가 그것을 망설인다면….

‘내가 할 거야.’

더 엉망으로 만들 순 없어. 김신화의 발차기에 무너져내리는 방벽을 보며, 신우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

몸에 활력이 가득 돌고 있다.
주체할 수 없는 힘. 잠깐 발을 잘못 디디는 것만으로 땅이 부서져 버리고 발판이 사라진다. 갑작스럽게 끌어올려진 몸의 성능에 적응하지 못해, 몇 번이나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세종시를 둘러싸고 있던 방벽이 무너진 것도 그 결과다.

세상이 무르다. 잠깐 만지기만 해도 뭉개질 것 같다.

”윽, 컨트롤이 너무 어려운데.”

자칫하면 저쪽 공무원들은 다 죽어버리겠군.
누나는 지금까지 이런 세상에서 살아왔던 걸까? 원래도 존경스러웠지만, 지금은 더 놀라울 정도다. 이러면 겁도 없이 옆에 얼쩡거리던 내가 짜증날 법도 했지.
신우진이 무슨 말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양서호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멈춰 서 있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자드 킬러 쪽으로 달려들었다.

[System: L급 악세사리 ‘외다리 병정의 팬던트’의 고유 기능, ‘세상의 오점’이 발동합니다.

// 세상의 오점: 세상의 법칙을 부순다.]

음속을 뛰어넘는 속도로 튀어나가는 몸. 찢어지는 파공음과 내리치는 번개.
위자드 킬러 두 개가 착지 한 번에 산산조각 나 분해된다. 주변에 서 있던 공무원들은 충격에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날아간다. 음, 의도한 건 아니지만 계속 그렇게 있으세요.

이 팬던트는 과거 김신화 222가 [외다리 병정]이라는 엔딩을 보며 해금된 것이다. 엔딩에서 김신화와 양서호의 데이터는 합쳐졌다. 당시에는 버그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정말로 합쳐졌던 거야.’

크툴루 월드에서 사람이 합체하는 일 자체는 드물지 않다. 보통은 린나수같이 키메라 같은 형상에서 끝이 나지만, 가끔 심연의 존재의 가호를 받아 정말로 존재 자체가 융합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신화 222는 양서호와 합쳐지는 길을 선택했고,
그 결과로 남은 것이 팬던트. 그러나 팬던트 자체는 그저 평범한 악세사리일 뿐, 아무런 힘도 없었다. 기념 업적 같은 물품.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이 팬던트를 방치해두었다.

그러나 팬던트가 정말로 구현되어버린 지금.
이 팬던트는 [양서호]와 [김신화 222]가 가지고 있던 데이터가 합쳐진 물건이 되었다.
그리고 적법한 사용자에 한해서, 이것은 잠재된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양서호에게 내재된 버그마저도.

지금 나는, 서호 누나를 제외하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팬던트가 가지고 있는 힘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누나, 말해야 할 게 있어. 사실 이 세상은 팬던트의 힘으로 구현된 곳이야!”

222번째는 이제는 사라진, 그저 게임의 회차일 뿐이다. 정말로 이 세계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래라면 존재할 수 없는 야사. 무도가 김신화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김신화는 [심연의 마법사]이기에 이곳에 있다.
하지만 대체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심연의 존재는 이 팬던트를 이용해서 222번째의 세계를 구현해냈다.

위자드 킬러와 공무원들을 지키기 위해…는 아니고 그냥 나를 한 대 때리기 위해 이쪽으로 날아오는 양서호.

”헛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신화야. 지금이라도 멈추면 봐줄게.”
”아니, 헛소리가 아니라 진짜라니까! 나도 사실 김신화가 아니야!”
”우리 신화가 너무 미친 나머지 자아 정체성에 혼란이 왔나 보군. 누나가 고쳐줄 수 있어. 비슷한 놈 몇몇 봤는데, 보통 맞으면 좀 낫더라.”
”아니, 김신화는 맞는데. 나는 원래 마법사야! 무도가 같은 게 아니라!”
”네가 가짜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굳이 따지자면 무도가-김신화 쪽이 가짜가 아닐… 아니 아니!”

방금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더욱 거세지는 양서호의 발차기.
이 누나 점점 막 나가네.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갈라지는 광경까진 아니더라도, 주변을 채우고 있던 병기들은 모두 박살나고 있는 상태다. 공무원들은 진작 익숙하게 재난에서 대피하고 있는 상태.
저 중에 신우진도 있지 않았나?

‘보이지 않는군. 뭐, 어디로 잘 피해 있겠지.’
”지금 나는 김신화가 가짜고 말고를 따지려는 게 아니야. 따지자면 우리 둘 다 같은 사람이고.”

정확히 말하자면, 시작점은 같은 사람이겠지. 지금까지 나는 김신화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했지만 사실 이 세계에 구현된 김신화도 김신화였을 것이다.
크툴루 월드에 오기 전까지를 공유하는 존재.
다른 직업, 다른 환경, 다른 길을 걸은 끝에 우리는 나뉘었지만…
방금 기적적으로 의견이 합치했다.

[System: ’광기-무도 집착증’이 발현합니다.]

’서호 누나를 데리고 나갈 거야.’
”결국 ‘김신화 222’도, 이 세상도, 누나도 구현된 존재일 뿐이야.”
나는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내가 이 팬던트를 가지고 홀랑 돌아가버리면 이 세계는 붕괴하고 말 거다. 나는 그것을 막고 싶다.
이 팬던트의 힘이라면 가능하다. 세상의 법칙을 부수고 비틀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해버리는 힘을 가지게 된 L급 악세사리.

”그걸 위해선 누나의 동의가 필요해.”
”일단 물어는 봐주지. 왜?”
”이건 누나와 나의 공동소유니까.”

나를 향해 무자비하게 달려드는 서호 누나. 나는 그 공격을 흘리며 양서호의 움직임을 나의 춤 안에 편입시킨다. 마치 듀엣처럼 스쳐지나가는 두 사람. 그리고 턴.

‘누나는 춤을 배운 적이 없다고 했던가?’

언제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괜찮다.
원래 춤은 옆에서 리드하는 사람이 있으면 쉽게 배우는 법이거든.
누나는 신체 능력이 좋으니까 빠르게 익힐 거야.

‘즐거워.’

양서호와의 싸움은 항상 양서호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서호 누나를 상대하는 건 10위계 마법사 몇 명을 데려와도 어려운 일이다. 양서호를 상대하며 나는 항상 극한까지 몰아붙여지는 버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0.1초의 판단 하나만 실수해도 내 몸이 부서져버리는 괴로운 싸움.
그러나 양서호와 동등한 위치에 선 지금, 나는 양서호와 함께 합을 맞추는 이 상황이 굉장히 즐겁다.
내가 공격을 맞받아칠 때마다 움직이는 양서호의 입가.

‘누나도 즐겁지?’

양서호와의 듀엣. 이 세계의 김신화는 끝까지 할 수 없었던 일.

누나가 원한다면 우린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있어.’
”누나. 나와 함께 세계를 구하자.”

그러니까 내 손을 잡아줘, 누나.

*
‘즐겁다.’

전투에서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걸까? 양서호에게 싸움이란 괴로운 것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피가 튀는 게 괴롭다는 말이 아니다. 아주 약간의 힘 조절, 약간의 판단만 실수해도 세상은 부서져버린다.
동료들, 더 나아가 적들을 한 번에 부숴버리지 않기 위해서, 양서호는 항상 극한까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지금, 양서호는 그런 손대중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와 있다.
양서호의 주먹에 맞아 뒤로 멀리 밀려나는 김신화의 몸. 주먹 끝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감각.
보통이라면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이다.하지만 김신화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다가오고, 이런 상황이 벌써 수십 번이나 반복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둘 사이에는 말이 줄어들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양서호는 김신화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패도적인 움직임의 양서호와는 다르게, 그림을 그리는 듯 유려하게 움직이는 김신화의 몸. 이곳이 무도회장이라도 되는 듯, 공간을 누비며 양서호를 자신의 심상으로 끌어들인다.

‘나랑 춤을 추고 싶은 건가?’

문득, 양서호는 과거의 김신화를 이해했다.

‘김신화는 나와 이러고 싶었던 거였어.‘

김신화의 춤 신청은, 양서호와 상호작용을 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하지만 양서호는 김신화와 춤을 출 수 없었다.
닿기만 해도 사라져버리는 상대와 춤을 추는 건 불가능하다.

-“신체접촉 없이도 듀엣은 가능해요.”

좋게 말했지만, 결국 그것이 범속한 김신화의 한계.
만찬의 제물의 복제라곤 해도, 그에게 주어진 힘은 세상의 오점은커녕 만찬의 제물에게도 닿지 않았다.
이 가짜 세계에선 자신이 돌아갈 방법조차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미쳐버린 김신화는, 양서호와 함께 있고 싶다는 소망조차도 이룰 수 없는 현실을 마주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System: L급 악세사리 ‘외다리 병정의 팬던트’의 고유 기능, ‘세상의 오점’이 발동합니다.

// 세상의 오점: 세상의 법칙을 부순다.]

양서호를 지키기 위해 세종시를 가두겠다는 것도, 양서호와 하나가 되겠다는 것도, 이 세상을 진짜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것도 전부 ‘김신화’가 바랐던 소망이다.
그걸 위해 김신화는 관리자와 거래를 했다.

그 결과가 지금, 양서호와 춤을 출 수 있는 김신화다.
김신화는 양서호가 행복하길 바랐고, 양서호는 지금 행복하다.

‘그런데….’
“김신화는 어떻게 된 거지?”
“뭐? 갑자기 무슨 말이야. 내가 김신화잖아.”
“너는 김신화가 아니라며?”

그래. 양서호가 알던 김신화는 김신화 222. 무도가 김신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망을 위해 존재를 바쳤고, 녹아내려 한낱 기물이 되었다.
지금 김신화 안에 있는 건, 김신화 222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인격과 사랑을 모사한 존재다.

“난 김신화에게 대답을 듣고 싶었어.”
“아까 그 질문 말이야? 그거라면 내가….”
“아니.”

양서호가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존재는….

“네가 아니야.”

만찬의 제물이 아니다.
공격 전술을 위해 김신화에게서 거리를 두는 양서호. 지금 그는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를 효율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머리를 쓰고 있다.
하지만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는 건 김신화가 더 많이 해온 일이다. 양서호가 멀어진 사이, 어느새 작동한 마지막 위자드 킬러까지 도달한 김신화.

“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어. 내가 밝힌 진실 때문에 나를 김신화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거지?”

그렇지만 누나가 알던 김신화는 이미 없어. 그래도 나는 김신화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런 말을 늘어놓는 만찬의 제물.

“그러니까 내가 대신 대답해줄게. 김신화가 했던 말은….”
“그만. 답은 안 들어도 돼.”

양서호는 품 속에서 손바닥 반절만 한 물건을 꺼내, 던졌다 받기를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금속이 빛을 반사하며 붉게 반짝인다. 양서호는 위자드 킬러 옆의 김신화가 아니라, 그 빛을 바라본다.
장미 모양의 브로치.
양서호는 다시, 가면을 쓰고 있는 김신화를 바라본다.

“그건 그 개자식이 나한테 한 고백이야.

그러니까 그 답도 걔에게만 들을 수 있어.”
양서호의 선택을 짐작했는지, 침착하게 설득을 시도하는 만찬의 제물.

“알겠어 누나. 누나가 원하면 [김신화 222], 아니 김신화를 되돌리는 방법도 생각해볼게. 사실 이미 비슷한 일을 해본 적이 있거든? 까마귀, 여우, 물소, 뱀이라는 친구들이었는데 다들 별점 5점을 눌러줬어.”
“괜찮아.”
“이 세계는 금방 무너져버릴 거야. 누나가 지키려던 세종시도, 대한민국도 전부 없어지는 거라고.”

손 안에 든 브로치를 부러뜨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쥐는 양서호.

“네가 온 ‘진짜’ 세계에는 대한민국이 있나?”
“…있지.”
“나도 있어?”
“있어.”
“공무원 일은 하고 있고?”
“아주 훌륭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긴 하지.”

그 대답에 양서호는 경쾌한 미소를 지었다.

“야, 누나가 재밌는 거 보여줄게.”

*
[System : 화신 ‘어둠에 깃드는 자’가 당황합니다.]

잠깐! 설마 팬던트를 부술 생각은 아니겠죠?

[System : 화신 ‘얼굴 없는 자’가 으쓱입니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은데 이제 어쩔 거임?

*

[System : 패널티 특성, ‘만찬의 제물’이…]

*

그건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왜죠!?
양서호는 만찬의 제물이 아닙니다.
*

[System : 화신 ‘어둠에 깃드는 자’가 짜증냅니다.]

그런 방법이 아니어도 막을 수 있는 수단은 얼마든지 있어요!

*

싸움의 여파를 피해 몸을 숨기고 있던 신우진은, 갑작스럽게 머릿속을 울리는 계시를 들었다.

『지금 이 세상의 오점은 만찬의 제물에 부추김을 받아,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있노라.』

‘뭐?’

…만찬의 제물이 누구야?

*

…좀 알아서 알아들으면 안 되나요?
이 세계에서는 김신화가 만찬의 제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신우진은….
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

『지금 이 세상의 오점은 김신화의 부추김을 받아,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있노라.』
『그 오점을 멸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을 비롯한 모든 것이 허망히 사라지리라.』
『그러므로 명하노니—세상의 오점을 죽여라.』

‘하지만….‘

망설이는 신우진. 김신화를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어째서 팀장님을 죽여야 하는 거지?

『내 아들아, 내 명을 따르라』

그러나 신우진의 망설임과는 상관없이, 그의 손이 움직인다.
사실 그는 오늘을 위해 뱀 인간들로부터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총을 받았다.
김신화를 죽이기 위해 가져온 총.
신우진은 그것으로 양서호를 겨눌 것이다.

*

그리고 양서호의 손에서 날아가는 돌멩이.
쓰러지는 신우진의 신형.

”우진아. 누나 믿지? 누나는 대한민국에 해가 되는 일은 안 해.”

터무니없는, 모순적인 발언. 광인의 논리. 양서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게 된다면 이 세상은 부서진다.
양서호는 자신이 미친 소리를 했다는 것 조차 자각하지 못한채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김신화를 응시한다.

”그래 김신화. 내 동의를 받는다고 치자. 그렇게 이 세상을 구해서 어쩔 셈인데?”
”걱정하지 마 누나. 원래의 세계에 이 세계를 구현할 거야.”
”그걸 위해서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그건 어쩔 수 없는 희생….”

아니, 어쩔 수 없는 희생 따위가 아니다.
김신화가 지금 하려는 일은 세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양서호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진짜 대한민국’이 부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게 다 김신화의 계획이었단 말이지?

김신화 그 개자식. 나한테 답변도 못 하게 하고 혼자서 이런 짓을 벌였군. 중얼거리는 양서호.

”건방지게, 공무원답지 않게 파괴마 같은 짓을 하고 다녀? 한 대 맞아야 해.”

그의 손안에 들린 것은 한때 선물로 준비했던 물건이지만 이제는 갈 곳을 잃어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걸 살 때부터 양서호가 무슨 대답을 하고 싶었는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나는 멍청하게 김신화한테 뭘 물어보니 마니 하고 있었군.’

양서호는 브로치가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쥐었다.
그리고 뒤로 빠지는 한 발.

*

나는 다시금 팬던트의 힘을 사용해서 양서호의 행동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해서 띄워본 아이템 창에 적혀 있는, 아까까지 없던 문구.

[System: 사용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크툴루 월드의 아이템들 중엔 가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사용자를 가리는 물건들이 있다. 내가 이전에 사용하던 사인참정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잠깐, 그렇다면 설마….’

*

”이봐 김신화. 너도 아까 김신화랑 똑같은 생각으로 대답해준다고 했지?”

파괴적인 소리를 내며 가라앉는 바닥. 아까 전에 찢긴 셔츠 사이로 보이는, 힘줄이 솟아난 팔뚝.
지금 양서호는 생애 최대의 힘을 준비하는 중이다. 주변이 파괴되는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는 전력 투구 자세.

”거기에 대한 대답은 네가 아는 양서호에게 들어. 내 대답은 너를 위한 게 아니니까.”

김신화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양서호의 팔이 휘둘러진다.

인지를 초월한 속도로, 양서호의 손에서부터 날아가는 장미 브로치.
본래의 물리법칙대로라면 아무런 처리도 되지 않은 이런 물건은 날아가는 도중에 부서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이곳에 다른 물리법칙을 강요하고 있다.

[System: L급 악세사리 ‘외다리 병정의 팬던트’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그것은 이윽고 김신화의 가슴에 걸려 있는 주석 팬던트에 닿는다.
쩌적—쩌적— 하고 금속이 갈라지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양서호는 홀가분한 기분을 느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이 올라간 입꼬리.
어떤 이들이 간절히 바랐을 양서호의 환한 미소.

‘김신화, 나는 너를….’

*

[System: 당신은 자신의 공포증을 극복하고, 공포의 대상을 파괴했습니다.
보상으로 극복한 공포증이 자연 치유되고 추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System: ‘광기-무도 집착증’이 사라졌습니다.]

-----------
6.


깨어나자마자 양서호를 마주친 사람의 반응은 보통 어떨까?
일단 정신을 잃었다가 양서호 앞에서 깨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위험한 상황이다.높은 확률로 당신은 양서호에게 기절당한 상태(높은 확률로 사지의 붕괴를 동반)다. 기억이 없더라도, '아, 내가 뭔가 잘못했구나'라고 판단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그렇기에 나를 내려다보는 양서호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내가 끔찍한 개자식 대신 사과할게!!!”
“잘못한 건 아나 보지?”

나는 살기 위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런데 조금만 시간을 줘봐. 나도 이번엔 정말로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사람 물건을 훔쳐놓고 그런 말을 한다고?”

…어라?
나는 또 김신화가 파괴마다운 짓을 벌였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누나 물건을 훔쳤다고?”
“그래.”
“혹시 그게 사교도의 성물 이런 거였나?”
“아니. 그냥 얼마 전에 얻은 팬던트였어.”
“…그걸 내가 왜 훔쳤지?”
“그러게 신화야. 네가 내 팬던트를 왜 훔쳤을까? 그건 지금부터 누나와 대화를 나눠보면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나는 한 손을 들어올리는 양서호를 피해 [점멸]을 쓰며 품속을 뒤졌다.

“돌려줄게! 잠깐만, 여기 어디에 있을 텐데….”

음, 이것도 아니고, 이 가면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어라? 이건가?
나는 손 안에 잡히는 것을 쑥 빼냈다. 반으로 갈라진 주석 팬던트. 원래는 하트 모양이었던 것 같지만, 이래서야 깨진 사랑밖엔 의미하지 않겠군.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팬던트를 내 앞에서 흔들었다.

“혹시 누나가 찾는 게 이거야?”
“그래. 그런데 부서졌네?”
“자, 잠깐만! 파편이 더 있을 것 같거든?! 기다려봐!”

다급하게 다시 품속을 휘젓던 내 손에 깨진 단면이 잡혔다.

‘이건가?’

제발 쪼개진 다른 반쪽이기 바랐지만, 정작 손에 들린 것은 브로치. 그것도 산산조각이 난 ‘브로치였던 것‘의 파편 하나쯤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원래는 장미 모양이었던 것 같군.’

내가 요즘 너무 험하게 싸웠나? 그래서 다 부서진 건가?
공교롭게도, 부러진 브로치는 마치 반이 잘린 하트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팬던트와 브로치를 들어올리자, 다른 물건임에도 마치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딱 들어맞는 단면.

‘흐음… 그렇다면.’

오랜만에 가면을 갈아끼운 나는 두 물건을 향해 마력을 뻗었다. 황금빛의 선이 넘실거리며 팬던트와 브로치를 감싸안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된 목걸이 하나. 반쪽은 주석, 반쪽은 브로치로 이루어진 전위적인 디자인의 장식이 달려 있다.
나는 그것을 양서호 쪽으로 휙 던졌다.
운동신경이 발군인 양서호에게, 던져지는 물건을 잡아채는 것쯤은 간단하지. 쓰레기 신체를 가진 김신화와는 다르다.

“이건 또 뭐야?”
“누나를 향한 나의 뜨거운 마음?”

나는 양서호를 향해 귀여운 포즈를 취했다. 연하남다운 애교를 피워서 화를 잠재울 생각이었지만… 왠지 기분이 나빠 보이는군. 아니, 좋은 건가?

‘저 표정은 대체 뭐지?’

잠시 기묘한 표정으로 목걸이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양서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지금은 공무 수행 중도 아니고, 물건도 돌려줬으니. 이번 한 번만 봐주지.”
“어? 정말? 진짜로?”

설마 했는데 이게 통한다고? 역시 누나도 연하남의 애교가 좋았던 거지 누나도 나를 좋아하는….

‘음, 저 살벌한 표정을 보니 절대 아니군.’
“다음엔 얄짤 없어.”
“이 은혜는 꼭 갚을게!”

나는 양서호에게 손을 흔들며 재빠르게 [관문 생성]을 사용했다.
그런데 공무 수행 중이 아니었다고?

‘그럼 대체 왜 내가 양서호랑 같이 있던 거지?’

광기가 발동해서 기억이 날아가 버렸나 보군.
마지막으로 있던 광기는 분명… ‘무도 집착증’이었나?
그러나 시스템 창을 확인해보자, 두 개의 광기가 있어야 하는 란의 한 칸이 비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극복했나?’

굉장히 찝찝한데…
일단 누나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여기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 같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뭔가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 같으니, 이 정도는 말해두자.’

나는 관문 너머로 몸을 던지기 전에 얼굴만을 남겨두고 양서호에게 소리쳤다.

“누나, 사랑해! 다음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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