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구두 - 책상
따사롭게 내리쬐는 마정석 태양.
중력을 거스르고 기세 좋게 솟아오르는 분수.
안 봐도 일기예보는 날씨 맑음.
이런 화창하고 아름다운 오후에 내가 해야 하는 행동이란 뭘까?
1. 빨래
하하. 빨랫감이 뽀송하게 마르기 좋은 날씨긴 하지! 하지만 틀렸어. 굳이 내가 집안일에 손대지 않아도 잘 처리되고 있는데다, 이미 오전에 상현씨가 돌돌이 목욕부터 이불빨래까지 다 마치셨기 때문에 할 게 없다고!
2. 산책
정말? 진심이야? 너무 성의 없는 대답아니야? 나 그냥 정답 말해도 돼? 아니다. 그냥 말해버려야지.
춤이다. 춤을 춰야 한다.
덕분에 나는 지금 [특수행동: 춤추기]를 30분 동안 하고 있는 중이다. 가끔 지나가다 누가 동전도 던지고 간다고. 젠장.
하지만 그거 아는가? 사실 내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유럽의 그림에나 나올 것 같은 광장에서 춤을 추고 있는 이유는 날씨가 맑아서도 태양이 딱 알맞게 온도를 올려주고 있어서도 아니다.
내겐 지금 [춤 집착증]이 생겨난 상태다.
춤 집착증? 생활근육만 간신히 남은 마법사에게 이런 고난이도 활동을 요구해? 장난하냐? 야 니알라 나와!
[니알라 아닙니다.]
어쭈. 또 그 레퍼토리야? 니알라가 아니면 뭔데? 이젠 좀 태도를 확실히 할 때도 되지 않았어?
[지금 이 극의 제목을 보시면 명백하지 않나요?]
낮고 소담스런 웃음소리에 연로자의 여유가 담뿍 담겨서 들려온다. 어쩐지 인자하고 포근한 느낌이… 잠깐, 너 설마 할머니 역인거냐? 어쩌면 돌아가셨을지 모를 우리 할머니한테 사과해.
[자 곁가지는 이쯤 해 두도록 하고, 관객 분들께서 지루해 하시니 이만 극에 집중하도록 하죠.]
파지지직. 시야에 푸른 스파크가 튀더니 메시지 창이 뜬다.
[System : 페널티 특성, ‘만찬의 제물’이 활성화됩니다.]
원 스텝. 투 스텝. 분수대가 있는 광장이 볼룸으로 바뀐다. 경쾌한 춤을 추면 자연스럽게 즐거워지지. 세로토닌의 활발한 분비. 셋 둘 하나로, 턴. 그리고 운동이 되고 체력이 붙어서 스트릿댄서 정도로 건강 점수가 올라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하. 그러면 나도 설탕을 왕창 넣고 졸인데다 무려 밀가루가 들어간 쫄깃쫄깃한 떡볶이를 먹을 수 있게 될 지도 몰라. 튀김이랑 순대도 얹어서! 신나는 기분에 무릎을 구부렸다가 반박자 후에 다시 모으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뛰어오른다. 와우. 생각만해도 사치스러운데? 감히 허접쓰레기 육체를 가진 김신화가 누릴 수 있을만한 사치가 아니다. 앗. 조금 숨이 차는 것 같은데? 장딴지 근육이 조금 저린 것도 같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춤을 출 광인의 동작이 조금씩 느린 템포로 바뀐다.
[좋은 춤이군요. 묻지 않아도 다들 동의하시겠지만, 역시 말을 잘 듣는 아이에겐 선물이 있어야 겠죠.]
아무 것도 없던 돌바닥에 장미 한 송이가 떨어지더니 그 질량에 어울리지 않게 텅텅 소리가 난다. 아니 저건 장현덕의 통찰안을 빌릴 것도 없이 역시 장미가 아니다.
[약소한 선물입니다. 그럼, 좋은 무대를 보여주시길 바래요.]
이윽고 호호 할머니처럼 모자와 숄을 뒤집어썼으나 그 아래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null object>는 퇴장하고, 이 자리엔 춤을 추는 김신화와 건강 스탯을 +4나 올려주는 대신 착용자에게 저주가 걸리는 유명한 아이템이 하나 남는다.
와 정말 갓 뽑아낸 마정석처럼 예쁜 빨간색의 구두다! 꽤 탄력 있는 재질의 멋쟁이 구두는 돌 바닥과 마찰할 때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도 발목에 가는 부담을 완화해 주었다. 앞으로 며칠, 몇 개월이고 춤출 지 모르는데 정말 완벽한 배려다. 스윙이라도 날리는 듯이 난간을 잡고 올라타 휘청휘청, 아슬아슬한 스텝을 밟는다. 그리고 난간 제일 높은 곳에 세워진 높은 장식품과 화분을 회전축으로 삼아 하강. 오 확실히 건강이 한꺼번에 4점이나 오르니 평소엔 꿈도 못 꿀 다양한 신체적 기예가 가능하군. 혹시 근육도 생긴 건가? 그렇지 않고서는 방금 전에 한쪽 팔로 내 몸무게를 버틴 기적이 설명되지 않는다.
밤 장막의 날개옷이 춤사위에 맞춰 이리저리 나부낀다. 몸을 움직이고 있고 아무 리듬이나 타고 있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샘솟는 도파민. 흥분. 도깨비들은 모두 이런 기분인건가? 다음에 도깨비들의 연회에 가면 음주가무에도 꼭 참가해 봐야 겠다. 천금대장의 춤사위도 구경할 겸 몽향 마시러 가야지. 지금 건강점수라면 까짓 거 몇 독쯤은 비울 수 있을 터….
“바하하하! 김서방.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겐가?”
아니? 이 도깨비가 양반은 못 되는 군. 바로 나타났잖아? 나는 서천슬이 오면 당장 부탁하고 싶었던 걸 거두절미하고 바로 입 밖으로 꺼냈다.
“당장 이 빌어먹을 발목 좀 잘라줘!”
***
구구절절한 내용은 스킵하자. 피를 무서워하는 도깨비에게 [설득] 판정이 성공하기까지 재시도하는 무수한 내용들을 굳이 서술해서 누가 득을 본단 말인가? 나는 결국, 어차피 발목을 잘라봤자 피대신 마정석이 흐를 테니 천금대장이 걱정할 만한 건 전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설득]에 성공했고, 다행히 자포자기해서 [매혹]까지 다시 시도하기 전에 천금대장은 내 영원히 춤추도록 저주받은 구두를 신은 발목을 얼쑤!하고 잘라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춤 집착증]을 없앨 수는 없지 않냐고? 그 말이 맞다. 그래서 나는 지금 결손된 하반신을 제외하고 도깨비에게 매달려 어깨춤을 추는 중이다. 젠장. 겉으로 보면 춤을 추는 주체는 서천슬이고 나는 어깨에 매달린 장식품같은 걸로 보이겠군.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갈 때마다 두루마기도 나풀나풀 거리는 것이 아주 패션템으로 전락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게다가 거품처럼 헛건강이 빠지고 나니 허탈함도 드는 것 같고. 건강 스탯 상승 옵션만 보면 정말 대단한 물건이었는데 그 놈의 저주가 문제다. 춤추는 동안 절대로 발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춤 집착증]과 연계하여 죽을 때까지 춤추게 하는 비효율적이고 영문 모를 황당한 저주는 또 뭔데? 덕분에 내 발목은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이후에도 저주의 영향을 받아 사람 놀리는 것처럼 아직도 팔팔하게 스텝을 밟고 있다. 발목만 남았는데도 저런 퍼포먼스가 가능하다니 나도 분발을, 아차. 또 집착증이 도질 뻔 했네.
마정석이 굴러다니는 광장에 저 혼자 춤추는 빨간 구두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서천슬이 드디어 나를 내려 놓았다. 그래 봤자 밤 장막의 날개옷에 달린 ‘비행’이 자동 시전되니 도깨비 어깨에서 풀려났다고 꼴사납게 넘어지진 않았다. 밤 장막의 날개옷의 고유기능 천마의 날개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메시지창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서천슬의 옆에 서, 아니 떴더니 이 도깨비는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김서방. 잔치를 여는 게 아니었나?”
이 자식. 아까 우는 다섯 살배기 달래주는 것 마냥 노래도 불러주고 온갖 아양과 북치고 장구치는 어름 끝에 간신히 발목을 자른 것 치고 벌써 입 싹 닦고 멀쩡한 낯짝이 되었잖아.
“내가 춤 좀 추었다고 잔치가 열리는 건 아니야.”
“어깨춤을 흥겹게 잘 추더니만 아쉽군 그래. 그럼 그건 역시 헛소문이었던건가?”
“헛소문? 뭔 소문?”
“김서방 자네가 섹시댄스라는 걸 추는 잔치가 열린다던데.”
그런 건 어디서 듣고 오는 거야? 아유 우리 김신화가 아이돌 뺨치게 춤을 잘 추긴 하죠. 다들 제 춤이 그리들 보고 싶으셨나요? 하지만 아무 때나 춰주진 않을 거에요. 기대하시라. 제 무대는 관리자를 족치고 나서 열릴 예정이니 자세한 건 제 매니저에게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잔치는 취소됐어.”
“그건 아쉽군. 그럼 저걸 가지고 만금대왕님께 가 볼 예정인건가?”
서천슬의 손 끝에는 한시도 쉬지 않고 경쾌한 스텝을 밟는 내 잘린 발목과 빨간 구두가 있다. 뭐, 구두에 담긴 저주라면 그래도 되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이성을 조금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건 저주 덕이니까.
≪진실 : 김신화의 잘린 발목도 결국 김신화다.≫
당연한 사실이죠? 나머지 인격이 공포증의 후유증을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내 신체의 물리적인 일부도 나 자신이기 때문에 저주의 분담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대로된 빙고다. 그리고 굳이 귀로를 타고 만금대왕의 영역까지 가지 않더라도 저런 저주는 얼마든지 파훼 가능하기도 하니 전혀 급할 일이 아니지. 나는 관리자가 깔아놓은 판을 깨부술 때까지 저 사소한 저주와 발목을 간수만 잘하면 된다. 자 이제 어디부터 깽판을 놓으러 갈까? 먼저 여기가 어딘지부터 정확히 알아야겠네. 어디보자. [공간 지배력]으로 파악해 봤을 때 이 곳은…
“후배님, 여긴 어쩐 일이야?”
아이 깜짝이야. 기척 좀 내고 다녀요. 대충 걸치고 있는 무스탕. 무릎 부분이 다소 패션적으로 찢어진 물빠진 청바지. 손 끝에서 흔들거리는 편의점 비닐 봉투와 조금 낡은 것 같은 운동화. 집동네를 어슬렁 거릴 때나 입을 것 같은 후줄근한 차림을 한 햇빛을 반사하는 금속 시계머리를 한 선배다.
“그건 제가 해야할 소리가 아닌가요, 선배님?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신 거에요?”
“어디긴 어디야. 집에서 온거지.”
어깨를 으쓱이며 등 뒤로 가리키는 엄지 손가락 끝에 있는 건 낯익은 바오밥나무다. 도보로 5분쯤 걸릴만한 곳에 별이 있네. 설마 했는데 여기는 차원의 경계선인가보군.
“그나저나 여기선 댄스 배틀이라도 벌이는 거야? 섹시댄스라는 건 또 뭐고?”
“아이참 선배님은 또 무슨 소리야?”
역시 여기에서 잔치가 열리는 거지?하고 다시 기웃대는 천금대장을 진정시키려고 하는데 그 앞을 빨간 구두를 신은 발목이 가로 막는다. 마정석 단면을 위협적으로 들이대며 마치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행위를 이어나가는 발목. 그리고 구두는 깡총깡총 뛰더니 갑자기 날렵하지만 그런대로 두께있던 옥스퍼드 남성화 외양에서 미친 듯이 z축 높이를 올린 킬 힐의 스웨이드 여성화가 되었다. 설마 그놈의 섹시댄스란 단어에 반응 한 거야? 나 진짜 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썩 보기 좋은 광경 같은 건 안 나올 텐데.
“아하. 어떻게 된 건지 알겠군.”
발목 위로 질량이 없어 보통의 몸으로는 구사하기 어려울 만큼 경쾌하고 가벼운 스텝을 밟는 발목을 노려보는데 바로 옆에서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훽 돌려 쳐다보자 공이수는 친절하게도 한번에 이해할 수 있을만한 단어들로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공간에 딸려온 해프닝이라나 뭐라나. 아하 특정 공간 진입 시 발생하는 돌발 이벤트 같은 건가 보군? 이전에 있던 동화 테마들의 위치 상 어떤 배경이, 어쩌고저쩌고 더 이어졌는데, 대충 이해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관리자가 극이 어쩌고 하는 걸 들었어.”
빨간 구두라면 그거잖아. 시도 때도 없이 빨간 구두를 신고 춤추게 되다가 할머니 장례식도 파토내고, 여차저차해서 결국 발을 잘라낸 회심한 소녀가 구원 받는 이야기. 앗, 그러면 니알라 이 새끼 장례식도 열려야 하는 거 아니야? 완전 제멋대로 각색해 놓고 뭘 하라는 거야.
“섹시댄스겠지.”
“아오. 그 때 다들 충분히 즐겼으면서 뭘 또 춤바람이 나길 바라는 거람? 춤추고 싶으면 그냥 혼자 춤 출 것이지….”
꿍얼대는 내게 바닥에 흩뿌려진 마정석들을 발로 차면서 선배님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잔소리하기 시작한다.
“어쨌든 계속 여기 있을 게 아니라면 알아서 춤추고 돌아가라고. 여기 어질러 놓은 것들도 다 치우고 가.”
“선배님 남일이라고 너무 막 말하는 거 아냐?”
“남일인데 뭘 바라는 거야?”
후배가 곤경에 처해 있으면 도와주는 게 선배로서의 도리 아니야? 아니 선배님 잠깐만, 진짜 그냥 이렇게 가지 말고 좀 도와줘.
“뭘 도와 달라는 거야? 이미 나올만한 배역은 다 정해져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선배님, 주인공이 바로 나인데 이대로 회심해서 구원받는 결말이 가능할 리 없잖아.”
이 말엔 반박할 수 없었는지 끄응하는 소릴 내더니 곧이어 수긍하는 우리의 자상한 선배님. 그쵸? 선배님도 그런 건 상상도 안 가죠? 이제 후배를 도와줄 마음이 생기셨나요? 선배 집 앞에서 후배가 계속 춤추고 있으면 엄청 산만해 지겠죠? 제가 선배님 입장이 되어도 그러고 싶진 않을 거 같네요.
“…뭘 도와주면 되는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무대 세팅 좀 해줘.”
≪계획 : 김신화는 오늘 아이돌이 될 것이다. ≫
***
먼저 오늘의 계획을 설명해 주겠다. 일단 아까 선배님에게 말한 것처럼 정석적인 진행 방법으로는 이 웃기는 삼류 극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진실 : 김신화는 미친 개자식이지, 회심하여 선인이 되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럼 다른 방법들은 무엇이 있을까? 무대 폭파 시키기, 죽을 때까지 춤추기. 이런 것들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무대를 폭파 시켜도 저 끔찍한 관리자 놈들은 무대를 변경하는 한이 있어도 계속 지금처럼 [공간 이동 마법 제한]같은 걸 걸어서 붙잡아 둘 가능성이 크고, 후자는, 뭐야? 어떤 놈이 이런 걸 방법이랍시고 언급한 거야?
아무튼, 그런 허접한 방법들 말고 내가 제시할 방법은 이것이다.
≪계획 : 김신화는 아이돌이 되어 관객들의 환호와 열광을 통해 극 진행 조건을 만족시키고 발생한 이벤트를 해지할 것 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내가 직접 idol, 즉 숭배의 대상의 되는 건 이미 반신의 격을 갖춘 내게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러니,
≪계획2 : 김신화는 대역을 내세울 것이다.≫
***
아이참 여러분. 오늘은 파괴마 김신화로서 온 게 아니라 매니저이나 무대연출이자 바람잡이MC이자 소품으로서 우리의 메인댄서 빨간 구두 양을 데뷔시키러 온 거 랍니다. 성대한 박수갈채와 환호로 맞이해 주세요!
“보십시오! 어떠한 속임수도- 비밀장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위협도요. 이 무대는 전적으로 여러분들의 즐거움을 위한 거에요. 사르륵 접히는 눈가와 롱스커트의 끄트머리. 어라 혹시 가면에 가려져서 눈웃음은 안보이시는 건가요? 하하. 그래도 제 눈웃음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가면을 보여드리고 있으니 다들 만족하셨겠죠? 후후.
“후배님, 정신차려.”
앗 맞다. 지금 소개시킬 건 가면이 아니었지 참. 이렇게나 아름답고 기능이 뛰어난 가면을 돋보이게 하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 겠다. 왜냐하면 오늘 무대의 주인공은 바로-
“환영해 주세요. 빨간 구두를 신은 발목 입니다.”
발뒤꿈치를 올리고 중앙까지 종종 걸어와 위아래로 까딱이며 인사하는 발목. 그리고 천금대장과 공이수의 손을 빌려 셋팅이 된 무대에 스포트라이트가 중앙에서 가장자리까지 무대 전체에 켜지기 시작한다. 신장이 작다 못해 거의 없는 발목을 위해 평범한 지하 아이돌 무대보다 훨씬 더 높게 설치된 무대 위에서 빨간 구두가 춤을 춘다. 작은 크기에도 각광 받기 위해 무대엔 아까 흘린 마정석들을 재활용해서 시선 집중이나 확대 효과를 가진 마법들을 팍팍 뿌려 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부분에 불과할 지라도 김신화의 일부인 발목이 시선을 모으지 않을 리 없다. 발목이 추는 게 아이돌 춤이던 왈츠던 어떤 박자를 타던 간에 발목은 결국 관객의 관심을 얻게 되리라.
성인 남성의 발을 담은 것 치고 아찔하게 얇은 스틸레토 힐이 바닥을 찰 때마다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무대. 이따금씩 힐에 채인 마정석 조각들이 비산한다. 붉은 색이 뭉쳤다 떨어질 때 마다 환호하는 소리는 높아진다. 좋아. 이쯤이면 마무리 지어도 좋겠다. 나는 발목에게 신호를 보내 무대 종료의 뜻을 알렸다. 하지만 무대에 남기를 고집하는 발목. 어쭈? 야 너 내가 다리 밑 빈 자리에다가 촉수 달면 어쩌려고 그래? 뭐? 돌아갈 곳이 안 필요해? 평생 안돌아온다고 너 혼자 계속 무대에 설 수 있을 것 같아? 춤이 밥먹여 준대냐? 응. 거기서 계속 춤춰 아빠는 집에 갈 거야. 협박 아닌 협박으로 발목에게 [회유] 판정을 시도한다. 실패. 실패. 성공. 휴, 이 고집은 누굴 닮은 거람. 어라 선배님. 그 의미심장한 시선은 뭔가요? 이제 무대에 막을 내려야 하니 한 눈 팔지 말고 빨리 움직이세요.
“이제 갈 수 있는 거지?”
“아이 선배님 자꾸 그렇게 섭섭하게 하시면 그냥 저도 여기 눌러 앉아 버릴 거에요.”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마.”
시침, 분침, 초침할 거 없이 전부 부르르 떨리고 있군. 하긴 우리는 이웃 사촌으로까지 발전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친분을 쌓고 있지.
“이동 제한이 풀린 거 같은데 이제 그만 가볼게요.”
선배 님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셨다. 어차피 배웅은 기대도 하지 않았고 천금대장은 아까 뒷풀이로 만취해선 돌아갔으니 나도 이만 가면 되겠지. 그나저나 발목은 어찌저찌 붙였지만 이 쪼잔한 관리자 놈은 내 구두를 안 돌려 줄 건가 보다. 날아가면 되긴 하지만. 씁. 이 힐 부러뜨리면 안되나? 영 익숙해 지지가 않네. 탁탁 구두 굽으로 바닥을 두드리다 아예 찍어버리는 동작으로 원래의 공간을 부수고 다른 공간을 잇는다. 토끼굴처럼 깊어지는 연결다리와 [공간 지배력]으로 느껴지는 저 너머의 익숙한 풍경. 흠. 잘 이어졌군. 확인을 마치자 마자 뛰어든다. 그리고 아무도 남지 않은 무대에 드리우기 시작하는 붉은 장막.
[흠. 만찬의 제물이 무대를 떠났군요.]
금빛 술이 달린 붉은 장막이 천천히 내려오고 사위가 어둠에 잠기기 시작한다. 장막이 닿는 자리마다 모래성 무너지듯이 허물어지는 행성. 이제 이 별은 다음 무대가 열리기 까지 닫혀 있을 예정이다.
[여러분의 마음에 드셨을 지 모르겠군요. 과연 이번 무대에선 어떤 점이 좋으셨나요? 후기나 설문조사에 참여해 주시면 향후 이벤트에도 참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럼 신사숙녀 여러분. 부디 즐거우셨기를 바랍니다. 다음엔 더 즐거운 무대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