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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 -함뜨

공이수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집, 소행성을 휘감은 바오밥나무 안에 앉아 있었다.
모서리 없이 동글동글하고 아기자기한 가구들, 나무의 호흡을 그대로 숨결 삼은 살아있는 집.
그곳은 조용하고 평온했고, 공이수를 괴롭히는 것들, 예를 들어 그날 기분에 따라 다른 사람처럼 되는 독고겸이나 자기 혼자 똑똑한 척하는 일 솔레, 혹은 재능 있는 소년- 독고겸의 22 아르카나 중 하나인 [레 스텔라] 공이수를 붙잡고 뭔가를 가르쳐주고 싶어서 안달 난 공간 능력자들이 없었다(안타깝게도 만세일원교에는 공간능력자들이 발에 채이도록 많다).

그리하여 공이수는 자신만의 공간의 적막과 고요함을 제법 즐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허공이 갑자기 찢어지기 전까지는.
[-----!]
갑자기 귀와 정신 양면으로 팽팽한 어떤 파장이 들려왔다.
허공이 난폭하게 찢어지고 있었다. 물론 만세일원교에 몸담은 사람들에게 허공이 찢어지는 것 자체는 놀라운 광경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이수가 익숙한 방식이 아니었다. 허공은 익히 공이수가 봐온 것처럼 매끄러운 단면으로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주로 독고겸의 솜씨였다), 마치 가죽을 힘으로 쥐어뜯는 것처럼 찢겨나갔다. 허공이 탄성 있게 늘어나다가 결국은 찢어지며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고, 늘어났던 허공은 너덜거리며 수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찢겨난 단면으로 무엇인가가- 검거나, 진홍색이거나, 춘녹색의 섬광이 뒤섞인 것이 마구 정신없이 회전하며 비명소리와 함께 튕겨져나왔다.
"아아아악!!!"
엄청난 속도였기 때문에, 그것은 방 안의 온갖 가구들을 박살내며 마치 공처럼 벽과 바닥에 몇 번 튕기고서야 간신히 멈췄다(벽에도 금이 크게 갔다).
"뭐, 뭐야!?!"
가구의 피해는 컸으나 [창조신의 오른손]을 가진 공이수에게 그런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이수는 벌떡 일어난 상태로 아주 긴장해서 그것이 회전을 멈추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이수는 아직 공간지각력이 부족해서 자신의 눈을 사용해서 해당 방향을 바라봐야 하는 나이였다.
허공에서 튕겨 나와서 사방에 온갖 방식으로 부딪치고, 그 속도를 못 이겨 회전하던 것은 한참 뒤에서야 천천히 멈췄다. 그러고서도 몇 호흡이 지난 뒤에서야 그것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일으켜 앉은 뒤에 간신히 헐떡이는 숨으로 입을 열었다.
"아아아아…. 죽겠네… 흐악, 이런 미친!!!"
그것은 탄식을 하는가 싶더니 공이수를 바라보다가 기겁하기 시작했다.
너무 기겁하고 있어서 조금 억울하기까지 할 뻔했다. 그러나 공이수가 억울해하기에는 상대의 존재감 및 비일상성이 너무 강렬했다. 방금 전, 입을 열 때까지는 경계선이 흐물거리고 있어서 마치 해파리나 솜사탕처럼 보였는데, 공이수를 바라보며 격분할 때쯤에는 이윽고 일반적인 인간이나 생명체처럼 그 경계선이 다시 단단해져 있었다. 그리고 일어나 앉아서 화를 낸다니, 너무 인간 같은 태도- 아니, 잠깐, 저 고양이처럼 보이는 건 가면인가? 그냥 인간이 가면을 쓰고 있다고? 인간?
"인간-인 건가?"
공이수의 소극적인 질문에 답하듯 가면은 냅다 소리 질렀다.
"이 자식들, 진심이냐!?!"
아니, 분명히 조금도 답이 아니었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공이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하지만 여전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전혀 놀랍지 않았다).
"미친 놈들! 반바지 선배님이라고!?! 변태!!! 도대체 무슨 취향을 가지고 있는 거야!!! 저 미끈한 허벅지를 보라고!!!"
그러니까- 이자식, 나를? 내 반바지와 허벅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공이수는 기겁해서 자신의 반바지와 가면 쓴 이상한 놈을 번갈아서 바라봤고, 잠시 뒤 자신이 좀 더 불쾌감을 느껴도 된다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는 빽 소리 질렀다(이때의 공이수는 아직 목소리가 얇은 어린이었다).
"내 반바지가 뭐 어때서!? 그쪽이야말로 진짜 미친 변태 아냐!?"
굳이 말하자면, 딱히 공이수의 반바지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별문제 없이, 씩씩한 어린이가 입고 다닐 법한 활동성 좋은 반바지였다. 하지만 가면이 지적한 것은 애초에 공이수에게 그 착장을 시켰다는 발상부터였다.
가면은 격정적인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비난해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배님이 반바지라니!! 이건 공이수 학대야! 너무 심하잖아!!!"
공이수는 조금 뒤늦게 가면이 자신에 대해 '반바지를 입고 있음' 이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일단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자신을 선배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공이수에게 반바지를 입혔다는 사실만으로 허공에 화를 내고 있었는데…
"잠깐, 내가 왜 선배님이야!?"
"흐음, 선배님. 좀 늦게 딴지를 거는 건 어릴 때부터 그랬군?"
가면 안쪽의 눈이 윙크라도 하듯이 찡긋해 보였고, 공이수는 아주 기분이 불쾌해졌다.
애초에 가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답은커녕,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알다 못해 수상한 애칭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기분 나쁜 놈이었다. 아니, 그런데, 진짜로 왜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우연히 공이수의 존재를 알고 있는 놈이 지금 이 시간과 공간에 떨어져내렸다고? 이건 마치- 공이수를 표적삼아서 찾아온 것 같은 상황이 아닌가?
불현듯 예사롭지 않은 위기감을 직감한 공이수는 왼손과 오른손을 들어 보이면서(필연적으로 기묘한 동양 무술 시작 자세 같은 모습이 되었다)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물었다.
"일단 지금이라도 다시 묻지. 넌 뭐 하는 놈이냐?"
"우와앗, 완전 레어한 <목소리를 낮춰도 하이톤> 선배님!!!"
그 대답만으로도 공이수가 가면 쓴 이상한 놈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충분했다.
말이 통하지 않거나, 혹은 말을 할 생각이 없는 미치광이와는 길게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 이는 공이수를 가르친 독고겸의 조언이었다. 물론 독고겸은 언제나 말을 할 생각이 있었고, 말이 통하는 상대와는 제법 긴 시간을 할애하는 편이었지만.
공이수는 그대로 가면에게 달려들었다.
"죽어, 가면!!!"
공이수의 키는 아직 성인에 비해서는 한참 작은 편이었는데, 그래서 공이수는 자신이 작고 어리다는 점을 이용해서 자신이 먼저 기습을 시도하곤 했는데, 이 기습은 정면에서 발동된다는 점과 상대가 체구가 작은 상대를 얕보게 된다는 점에서 늘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곤 했다. 기술적으로는 일종의 태클과 비슷하게, 일순간 한쪽 무릎을 꿇는 것과 동시에 공간을 우회해서 상대의 등 뒤나 수직, 수평 시야각 밖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동 자체는 간단했지만 시야에서 즉각 사라지는 효과가 있어서 늘 괜찮게 먹히는 기습이었다. 하지만 공간능력자들에게도 제법 잘 먹히는(이는 공간능력보다는 시야각에 관련된 문제였다) 이 회심의 일격을 가면은 그야말로 유령처럼 훌쩍 피해내면서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라?"
그 목소리는 절대로 비명이 아니었고, 말은 어라? 였지만 실력에 당황한 것도 아니었다.
"선배님? 이때는 진짜로 어린 맛이 있잖아?"
"뭐?!? 이 미친 변태가!!?"
하지만 충실하게 전투기술을 배운 공이수는 첫 번째 일격이 실패했다고 좌절하거나 머뭇거리는 대신 다음 공격을 매섭게 이어 나갔다. 그러나 하나도 맞는 것은 없었다. 가면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러했듯이 일순간 그림자처럼 허물어지면서 공이수의 공격을 흘려보냈다가, 매서운 연격이 끝난 뒤에서야 다시 형상을 되찾았다. 그리고 입이 생겨나자마자 빠르게 이어지는 감탄.
"아니, 진짜로! 뭔가 선배님 맛이 나는데 어설프다고!"
"닥쳐!"
공이수는 이를 갈면서 [창조신의 오른손]으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그림자 형상으로 회피한다고? 그러면 빛은 어떨까? 물론 공이수가 뭔가 빛을 내는 물질을 만들어낼 정도로 능숙한 창조자는 아니었다. 공이수는 단지 바닥에 휘발성 유증기를 흩뿌린 다음 터트렸을 뿐이다. 온 사방이 터질듯한 열기와 빛으로 가득 찼다. 가면은 모든 공간을 채운 그 격렬한 열기와 빛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다가-
"아, 어설퍼!"
-바람처럼 공이수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
공이수에게는 안타깝게도 가면의 일격은 귀여운 깜짝 상자처럼 튀어나온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이어지는 힐난까지 포함된 것이었다.
"선배님,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도대체 이 어설픈 마무리는 뭐야! 자기 그림자 정도는 생각했어야지!"
"아, 젠장!"
공이수는 다시 한번 공간을 왜곡하며 소란스러운 미치광이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번 공격도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도 아까와는 달리 그나마 성과가 있었는데, 가면 쓴 미치광이의 손으로 보였던 것이 실은 손처럼 의태하고 있는 촉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젠장, 이번 건 육체가 아니라 공간을 속박하는 방식이어서 일 솔레도 한 방 맞는 공격이었는데. 이런 걸 넘겨버렸다고? 독고겸 수준의 강자인가?
"실망스러워! 그래도 귀여워!!"
…하는 말은 독고겸과 거의 비슷하긴 했다.
"아악!"
공이수는 분김에 소리를 내지르면서도 김신화가 아직 공격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침착하게 눈여겨보았다. 왜지? 적의가 없나? 내가 그 [선배님]이기 때문에? 아는 사이라고? 하지만 나는 저런 후배가 없는데. 공이수는 조금 더 긴장한 표정으로 가면 괴한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정말로 네 개의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공이수가 뭘 하는지 바라보는 것 정도에 더 큰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호기심이라고? 이게 더 위험하군. 공이수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만세일원교의 일원들이 공유하는 위험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우왓!!! 선배님이 뭔가 [수상한 신호]를 보낸다고?"
"으악!!"
가면은 그 순간 처음으로 공이수를 공격했는데, 아니, 잠깐, 공격이 아닌가? 가면의 손에서 거의 즉시 뻗어나온 마력이 공이수를- 아니, 공이수의 근방을 날카롭게 꿰뚫었다. 공이수는 자신이 뭔가 착각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게 뭐지? 마력? 만세일원교에서는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힘, 공간능력자의 힘. 아니,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공간과 유사한 속성이지만 조금 다르다. 그 마법-어쩌면 신성력은 공이수가 이미 보낸 위험신호를 [취소]했다. 공이수는 그제서야 가면이 쓴 힘이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자식, 인과를… 뒤틀었어?"
"어떠한 속임수도-비밀도 없습니다."
가면 쓴 미치광이는 마치 공이수의 깨달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굉장히 얄밉고 과장된 태도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안타깝게도 독고겸이 이끄는 만세일원교에서 이 정도의 제스쳐는 정말 일상용이었기 때문에 공이수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고, 김신화가 원했던 [도발] 효과는 전혀 생기지 않았다. 생각 외로 어른스럽게 도발을 흘려보내는 공이수를 보던 가면은 머쓱하게 머리를 벅벅 긁더니 의외로 대화를 먼저 제안했다.
"하여튼 공격할 만큼 다 했으면, 선배님, 잠깐 대화 좀 해도 될까?"
"싫어. 여태 내 질문에 자기 할 말만 했잖아. 앞으로도 뭔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겠지."
"…예리한데?"
가면은 허가 찔렸다는 듯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공이수는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는데, 어쨌든 미치광이는 독고겸 못지않게 말이 많았기 때문에 공이수가 대답하든 말든 다시 말도 되도 않는 변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들어봐 선배님. 다짜고짜 시공간에서 미아가 되었다가 빠져나왔더니 대뜸 눈앞에 나타난 것이 어린 왕자 테마 선배님이라니 진짜 대충격 이벤트 아냐?! 너무 과한 자극이라고. 게다가 반바지 같은 순진무구한 코스츔까지 입고 있잖아! 어떻게 세상에 이런 법이 다 있어!? 응?"
"…조금만 더 길게 설명해 봐."
너무 정보값이 많은 변명이었다.
공이수는 일단 자신에게 상대의 입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심지어 이런 위험한 상대가 나타났다고 경보를 알릴 수 있는 능력조차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망을 갈 수 있을 리 무방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으며, 분명한 애정이 엿보이는 '선배님'이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공이수에게 무례하거나 과격한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보았을 때 가면 쓴 괴짜가 공이수가 모르는 방식으로 공이수를 알고 있으며, 호기심과 뒤섞인 애정을 표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 이제 이야기를 해줄 거야?"
"그래."
일단 공이수는 상대가 미치광이라는 전제하에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공이수에게는 일정 주기로, 특히 조증일 때 미치광이에 가까운 상사 겸 양육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방면에는 풍부한 경험이 있었다.
앳된 얼굴의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이어지는 공이수의 질문.
"가장 먼저… 어린 왕자 테마가 뭐야?"
"엥? 이 세상에는 어린 왕자가 없나?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동화책이에요, 선배님."
자연스럽게 섞여나오는 존댓말. 선배님이라는 애칭은 정말로 선배, 후배 할 때의 그 선배인 건가? 저쪽은 후배인 거고? 가면의 이야기에 섞여나오는 정보값들을 더듬어보면서 공이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몰라, 난 책 별로 안 좋아해."
"아하, 그러시겠군요. 그렇겠지. 그동안 선배님이 쉬는 시간에 책 읽는 모습을 본 적은 없고… 어라? 그러면 누가 선배님을 이런 세트장에다 데려다 놓고 이런 옷을 입혀놓은 거야?"
"…."
"특히 어깨에 별 장식이 달린 옷을?"
"……."
공이수는 잠시 어깨에 별 장식이 달린 자신의 옷과 김신화의 펑퍼짐한 후드티를 번갈아서 바라봤는데, 그제서야 두 사람의 복장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흰 셔츠와 반바지, 두꺼운 벨트, 그리고 어깨에 별이 달린 녹색과 적색의 코트…. 아, 음… 그러니까 보통은… 옷에 좀 더 장식이 없나? 독고겸의 진심 컨셉 복장들에 비하면 평범하지 않나?… 아닌가?….
두 사람의 복장에서 뭔가 차이점을 느낀 시점에서, 공이수는 이전까지 없었던 미약한 어떤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순간의 의의는 그야말로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순간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감정의 이름은 바로 [부끄러움]이었다.
공이수는 어쩐지 자신도 모르게 약간 기세가 죽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독고겸이 세팅해 줬는데."
"아아. 음. 그런 거구나. 나쁜 건 독고겸이야. 선배님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부끄러워한 적 없어!!"
"아이참, 이런 부분까지 귀엽잖아~!!"
*
가면이 한동안 더 소란을 부린 뒤에서야 다시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 같은 것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공이수가 필사적으로 막았기 때문에, 가면이 자신의 마음처럼 공이수를 번쩍 들어올려서 둥기둥기하거나 쓰담쓰담해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나친 [특수액션: 귀여워하기]에 시달린 탓에 한껏 야생동물처럼 경계의 자세를 취한 공이수가(동물이었으면 털이 곤두섰을 것이다) 날 선 목소리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너는 왜 나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그야 내가 미래에 선배님의 후배가 되기 때문이지."
여기까지 순순히 대답했던 가면은 문득 머리를 벅벅 긁고는 얼빠진 목소리로 물어봤다.
"어라? 근데 이런 거 이렇게 말해줘도 되는 건가?"
"너, 시간 능력자야?"
아니, 젠장, 멍청하게 알고 있는 걸 소리 내서 물어볼 필요가 없잖아. 아까 가면은 이미 인과를 역전시켜서 공이수의 [위험신호]를 취소한 바가 있다. 다행히 가면은 대답 대신 또다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런 걸 선배님에게 내가 설명해 줘야 하는 날이 오다니…"
"대답, 대답!!"
"조금은."
어쨌든 확언을 들은 공이수는 경계 가득한 표정으로 가면을 바라보았다.
조직의 특성상 만세일원교에는 공간 능력자가 조금 과하다 싶게 많았고, 어느 조직이든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가진 이후부터는 보험삼아 예지능력자를 구비해두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시간 능력자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그리고 역시 범-사교도-연합체인 조직 특성상 사교적인 사람들은 좀 지나치게 밝고 오지랖이 넓었고, 재능 있는 어린이인 공이수를 쿡쿡 쑤시면서 뭔가 가르쳐주고 싶어하는 사람도 열 손가락 넘게 있었다. 하여튼 공이수는 공간과 시간 그 두 가지 분야에서 두루 익숙한 편이었고 저 눈앞의 미치광이는 흔히 보이곤 하는 얼치기-예지능력자들과는 차원이 달라 보였다.
"시간 능력자가 도대체 왜 여기 온 거지?"
공이수는 두 손을 위협적으로 들어 올리며 물었다.
가면은 무해함을 강조하고 싶은지 역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더블-티라노-포즈] 상태였다.
"실수야, 실수, 진짜로! 아니, 내가 미래에서 선배님이랑 같이 뭘 하고 있었는데- 아참, 이런 거 시간여행 딜레마, 어쩌고 그런 거 때문에 세부 내용 말하면 안 되지? 하여튼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예기치 못한 말할 수 없는 습격을 받았거든. 그래서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가 필사적으로 선배님의 흔적을 따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와보니까 이 흔적은 우리 선배님이 아니라 아기-선배님이었던 거지."
"아기-선배님…."
스스로를 아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청소년 공이수는 이 모욕적인 워딩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에서 스치고 지나갔고, 결국 공이수는 너무 격한 말을 내뱉는 대신 짧게 답했다.
"그러면 빨리 돌아가기나 해."
이 차가운 대답에 가면은 오히려 조금 애교스럽게 굴었다.
"아이, 방금 왔는데 정 없게."
"정? 왜 말을 돌려?"
"아,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넘어가나?"
이 어설픈 반응에 공이수는 조금 역정을 냈다. 이미 공이수의 짧은 생애에서도 독고겸의 아르카나인 공이수를 단순히 어린애로 생각하고 터무니없이 얕보는 사람들은 충분할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나를 완전히 어린애로 생각하는 거야?!"
"아니, 잠깐, 잠깐, 나이랑 상관없이 그냥 선배님으로 생각하고 있던 거야. 진짜로."
이 녀석의 [선배님]이란 도대체 무슨 존재인 것인가?
말을 적당히 돌리면 넘어가 주는 존재!?
"빨리 꺼져!"
"아냐, 선배님, 그게… 진짜로 방금 와서 아직 돌아갈 방법이 뭔지 감도 안 오거든?"
"돌아갈 방법을 못 찾았다고?"
"어린 왕자 테마니까… 음… 어린 왕자 원작 전개랑 관련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만약 원작 전개대로 가야 한다면… 원작 동화는 어린 왕자가 죽으면서 끝났거든?"
드디어 [모드: 비치사공격]의 종료인가?!
공이수는 경계의 눈으로 가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가면은 무서운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그 이야기를 행동에 옮기는 대신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선배님을 죽일 수는 없겠지. 지금 이 상황은 [적당히 현실처럼 보이는 가짜]일 확률이 가장 높지만, 그래도 이게 만약에 하나라도 [진짜 과거] 라면 선배님이 죽는 순간 미래의 나는 아주아주 곤란해질 거라고. 아니, 내 손에 선배님이 죽는 순간 지금 이 상황이 [진짜 과거]가 될 확률도 있어."
지금 이 순간 가면은 굉장히 미치광이처럼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기에 공이수는 혼잣말을 참을 수 없었다.
"미치광이…."
"음? 난 마법사니까?"
"마법사면 당연히 미쳤다는 투인데?"
"아니면 정신이 이상하지 않은 마법사의 이름을 대봐."
그런 방식으로 공이수를 간단히 격퇴한 다음, (공이수는 가면의 말대로 "루오타!" 따위를 외쳐보려고 입을 연 시점에서 이미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가면은 역시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하여튼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내가 선배님을 죽일 수는 없어. 어쩌면 이 테마의 무대에서 퇴장하려면 반대로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둘 중 하나가 죽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착란 아냐?"
"아냐, 아냐, 잠깐만."
가면은 혼자서 자신의 몸을 만지작거리더니 손처럼 보이던 촉수의 의태를 풀어냈고, 그것을 망설임 없이 [떼어냈다]. 이 갑작스러운 자해에 펄쩍 뛴 것은 여전히 공이수 혼자다.
"으악! 이 미치광이!!"
"선배님이 아직 귀여운 맛이 있다니까."
가면은 아프지도 않은지 태연하게 그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설명도 하지 않은 것 치고는 가면 주변의 마력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이수는 불안스러운 눈빛으로(뭔가… 나름 조치를 취하긴 한 거겠지…?) 그 격렬한 마력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한편 촉수가 떨어진 절단면에서는 피가 주르륵 흐르는가 싶더니, 그것은 마치 붉은 소금 결정처럼 불투명하게 맺혀 바스락거리며 쏟아졌다. 가면은 그것을 모아 자신의 손에 올리더니, 마력을 좀 집중시켜 무엇인가 시도했다. 그러자 그것은 그대로 연기가 되어서 사라졌다. 공이수는 덩달아 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가면, 뭔가 좀 알아냈어?"
가면은 엄청 시원하게 대답했다.
"좋아, 지금부터 날 죽여줘!"
"싫어!"
공이수는 바로 질색했고, 가면은 반문했다.
"어라, 어린 왕자가 죽는 쪽이 더 취향이야?"
공이수의 대답은 강경했다.
"아니, 둘 중 어떤 쪽도 싫어! 이건 [청소년 학대]야!!!"
"청소년… 학대!?! 청소년 학대!?!"
이 충격적인 어휘에 가면은 꽤 큰 충격을 받았는지, 굉장히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배님한테 내가… [청소년 학대]를 저지르고 있었다고!?"
"맞아."
"훌륭, 훌륭합니다!"
이 마지막 말은- 당연히 공이수나 가면의 대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가면에게는 불운하게도, 당연히 지금 등장할 법한 사람이며 가면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아,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잊지않고 주장할 수 있다니, 역시 나의 아르카나, 만세일원교의 내일을 비춰주는 작은 북극성!!!"
언제나 말과 감탄사가 길고, 어마어마한 컨셉충이자 그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강자, 세계 최고의 공간 능력자-
"독고겸!!!"
"그래요, 나의 별빛, 나의 레 스텔라, 당신의 구원자이자 보호자가 왔습니다!"
*
공이수의 앞을 가로막듯이 선 독고겸은 오늘은 왠일로 꽤 평범한 정장 차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의 컨셉은 바로 [존윅]이었으나, 어린 공이수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공이수가 보기에는 그냥 어쩐지 아주 평범하고 수수한 정장 차림의 독고겸. 물론 그 육체에는 [소중한 것을 잃은 미국 남성] 못잖은, 아니, 그 이상의 굉장한 힘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리하여 평범한 정장처럼 보이나 실은 컨셉충- 그리고 원작 컨셉보다도 더한 강자, 독고겸의 매서운 질문.
"당신은 누구-"
"에? 레 스텔라? 선배님, 혹시 독고겸의 아르카나에서 [별] 포지션이었던 거야?"
독고겸의 말을 끊으며 김신화가 버럭 소리 질렀다.
"같은 소년 포지션인 [태양] 일 솔레랑 맞춰서 [별] 레 스텔라가 된 거냐고!!! 쇼타 콤비냐고!!!"
"무슨 상관이야!?"
"잠깐, 무례합니다!"
질 수 없다는 듯, 김신화의 개탄과 공이수의 반박을 끊으며 독고겸 역시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은 제가 당신은 누구냐고 물어보면 당신도 너야말로 누구고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물어볼 타이밍이 아닙니까?!"
"별로 궁금하지 않아! 뭔가 만세일원교의 대표다운 엄청난 방법이 있었겠지!!!"
굳이 말하자면 독고겸이 세계 최고의 공간능력자이고, 공이수의 개인 공간 역시 어느 정도는 독고겸의 능력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인과역전]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 때는 감지할 수 있다는 것도. 물론 독고겸에게 이러한 이유를 설명할 기회는 없었다.
"아아, 저의 능력을 꿰뚫어 보았단 말입니까? 놀라워, 아주 놀라운 지성이군요!"
"하여튼 난 안 궁금하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쪽이나 해!"
나름 각자의 입장을 고려한 괜찮은 제안이었다.
독고겸은 이 제안을 냉큼 받아들이고는 다시 아까 하려던 말을 하려던 어조로 이어갔다(다소 뜬금없어졌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어째서 미성년자에게 사람을 죽이라는 가혹한 제안을 건네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김신화는 문득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성년…자…."
"그래요, 채 저물지 않은 저녁 하늘에서부터 미약하게 반짝이는 나의 금성, 나의 레 스텔라에게!"
김신화는 두 손으로 잠시 머리를 부여잡았다가, 절망적으로 한쪽 손을 들면서 중얼거렸다.
"잠시만…. 내가… 독고겸도 나도 그대로인데 선배님만 이름이 달라진 미성년자라서 내가 청소년 학대범이 된 이 상황을… 지금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래… 잠깐만 나한테 시간을 줘…."
"흐음?"
"아… 그러면 이 시점의 만찬의 제물은 백범진이나… 아니, 양서호겠군…."
독고겸은 이 혼잣말에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김신화는 자신의 고통에 심취하여 답해줄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결국 처음부터 김신화는 일관성 있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던 공이수가 그냥 독고겸에게 알아서 설명했다.
"가면은 미치광이야."
깔끔한 설명이었다.
"그렇군요, 레 스텔라. 소중한 시간을 미치광이에게 나눠줄 필요는 없지요."
"아니, 잠깐, 방금 뭔가 엄청 억울해졌는데??"
독고겸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우아한 손동작을 취하며 말했다.
"당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습니다- 격의 차이를 보여드리죠. [좌절]하고 [절망]하십시오."
그 순간 독고겸을 중심으로 기괴한 방식으로 공간이 확장된다. 마치 만화경이 그러하듯, 둥글게 배열되어 반복되기 시작되는 공간의 일부분들. 무한한 프렉탈처럼 뻗어나가는 기하학적인 공간 재구성. 독고겸이 [근사한 독고겸 포즈]를 취하며 중력과는 무관한 존재가 되어 부유하기 시작했고, 공이수 역시 익숙하게 그 흐름에 합류하며 김신화를 바라보았다. 보통은 이 정도의 압도적인 능력을 본 적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신화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음, 그래. 아직 20% 정도군. 뭐 나도 느긋해도 괜찮으니까."
여전히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으나, '모두가 여유로운' 기묘한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독고겸이었다. 독고겸을 만세일원교의 수장으로 만들어준 그 놀라운 능력으로 김신화가 서 있던 자리에 가느다란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그 즉시 횡으로 잘려버리는 공간. 그러나 상대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즉사기라고 말할 수 있을 법한 공격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이미 김신화의 목소리 뿐이었다.
"정답! [용맹을 살해하는 균열(바리사다;Balisarda)]!"
"훌륭해! 정답을 맞췄으니 상을 드리겠습니다!"
독고겸이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김신화가 서 있던 자리에 예의 이능이 가볍게 날아들었다.
공이수는 독고겸의 이 무시무시한 공격에 익숙했다. 바리사다는 무엇이든 자를 수 있고, 방어도 불가능한 공격. 그러나 놀랍게도 가면은 공이수만큼이나 이 공격에 익숙한지 그야말로 능숙하게 피해 가며(놀랍게도 아까 공이수의 공격을 피할 때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반사적으로 피하며) 반격을 날리는 것이다.

[마력탄] [섬뜩한 방출]

마치 독고겸의 공격을 흉내 내듯이, 무조건 명중하는 종류의 마법들이 도무지 물리적으로는 전부 피할 수 없는 각도로 매섭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독고겸 역시 이런 종류의 공격을 통상적인 회피 절차를 거쳐서 피하는 사람은 아니다.

[찾을 수 없는 찬란한(오트클레르;Hauteclere)]

공간을 일순간 비틀어버리는 공간능력자다운 회피, 그 직전 자신이 서 있던 위치와 전혀 상관없는 위치에서 나타나는 독고겸- 물론 예상할 수 없었다는 것은 제3자의 입장에서다. 공이수는 독고겸의 아르카나, [레 스텔라]로서 이 순간이 올 것을 알고 있었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공이수의 등 뒤에 바로 붙어서 등장한 독고겸이 외쳤다.
"지금입니다, 이수 군! [그 손]을 쓰시죠!"
"하아앗!! [창조신의 오른손]!!!!"
이 합공에 김신화는 냅다 비명부터 질렀다.
"아악!!!!!!"
…어쩐지 얼굴이 붉어진 공이수가 오른손을 치켜든 채로 소리를 마주 질렀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왜 소리를 지르는 거야?!"
"부끄러워서!!! 부끄러워서야!!!!"
"부끄러워하지 마, 가면!!! 나도 신경 쓰이잖아!!!"
여전히 공이수의 오른손에는 [치명적인 독성 물질]이 모여들고 있었으나, 그보다 치명적인 [부끄러움]은 공이수의 이능력 사용을 둔하고 느려지게 만들었다. 한편 이 순간 무엇인가를 깨달은 독고겸 역시 충격받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뭐?! 마치 아담과 이브처럼- 순결하게 수치따위는 모르고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랑스럽게 키워나가던 나의 레 스텔라가- 지금 당신 때문에 [수치]라는 감정을 알게 된 겁니까!?"
독고겸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감히 나의 작은 별을 더럽히다니!?"
"너무 최악의 대사 선정이야!! 선배님의 정신이든 몸이든 더럽힌 적 없어!!!!"
"둘 다 미성년자에게 순결 따위로 비유하지 마!!!!"
"아아, 하지만 레 스텔라, 당신은 저 사악한 가면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직장 상사한테 이런 거지 같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도 청소년 학대야!!! 엄연히 성희롱이라고!!!!"
개판, 정말로 개판이었다.
*
그러나 독고겸에게 더러운 이야기로 공이수의 정신과 몸을 더럽히지 말라고 역설하려던 김신화는 그 지점에서 문득 깨달았다.
원작에서는 어린 왕자가 죽어서 지구를 떠났지만, 애초에 그건 어린 왕자가 몸을 가진 채로는 지구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하지만 어린 왕자는 애초에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별을 떠났던가? 우주 철새, 혹은 비야키, 하여튼 우주선이나 궤도 엘리베이터 역할을 해줄 무엇인가가 있으면- 죽지 않아도 [퇴장]은 가능하다는 의미잖아?

현재의 [자원]을 정리해 보자.
일단 현시점 최고의 공간 능력자- 독고겸.
그리고 미래에 역시 최고의 시공간 전문가가 될 공이수.
마지막으로 시간을 뛰어넘는 존재인 [먼지를 밟는 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 김신화.
뭔가 시간과 공간 전문가가 다이어그램처럼 겹쳐있는 상황이군. 그리고 미래의 공이수는 어차피 그 모든 것이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즉- 미래의 공이수의 [존재]가 있다면 시간과 공간은 동일한 [자원]이 된다.

"끄응, 제대로 안 끊어내면 나중에 엄청 곤란해질텐데."
자신만 알 수 있는 말을 투덜거리면서 김신화는 독고겸의 참격을 피해낸 뒤, 독고겸의 뒤를 잡으며- 아니, 뒤쪽으로 이동하며 범위공격을 시간차로 모든 공간에 깔아두었다. 독고겸이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김신화가 유도한 특정 경로를 취하거나, 혹은-
"죽어라, 사악한 청소년 학대범!"
김신화의 위치로 이동해서 공격하지 않을까?
마침 딱 필요한 것이 필요한 순간에 로켓배송되고 있었다. [접근]거리까지 이동한 독고겸의 초-근거리-참격이 김신화가 서 있는 바로 그 좌표를 상대로 발동되었다. 좋아, 이거로 시작하면 되겠군. 최고의 서비스, 별점 다섯 개 드릴게요.
"좋아, 아니지, 싫어!"
김신화는 일순간 발휘된 독고겸의 이능에 마법적으로 개입했다. 공간 조작? 좋아, 그런데 좌표를 조금 뒤틀어볼까? 엑셀로 치자면 순환수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러면 이제 결과값이 x, y가 아니라 error로 뜨겠지? 이 갈 곳 잃은 에러 메세지를 복사하면- 짜잔! 자신의 이능력이 변질되는 것을 느낀 독고겸이 단말마를 외쳤다.
"이건-!!!"
"신기하죠!? 민첩한 하루 되세요!"
이능력이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구현되며 게걸스럽게 독고겸의 힘을 빨아들였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힘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빨려 나가는 순간 독고겸은 불길함을 느끼고 즉시 김신화에게서 몸을 빼려고 했으나, 이미 김신화는 반신의 격을 얻은 자. 그는 독고겸이 통제하려던 공간의 힘에 시간의 힘을 얹어서 다시 한번 뒤엉키게 만들고, 얄밉게도 그 힘으로는 독고겸 대신 자신이 이동했다. 독고겸이 원래 이동하려던 그 위치는 바로-
"뭐야!?"
"아기 선배님, 잠깐만 미래의 선배님 좀 불러올래?"
공이수는 기겁했으나 김신화는 별로 개의치 않고 공이수의 손목을 잡으며 [먼지를 밟는 자]의 능력을 사용하였다. [먼지를 밟는 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시간을 초월하면 김신화는 [미래의 선배님의 힘]도 잠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이수는 김신화에 의해 일순간 자신이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자신의 능력이- 혹은 그 이상의 것이 사용되는 것을 느끼고 격분과 동시에 조금 압도되었다. 그 알 수 없는 힘은 낯설긴 했으나 분명히 자신의 것이었다. 시간과 공간은 나누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보다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부분에서 하나였다. 인지의 수준을 넘어선 곳에서의 이해. 아득한 미래의 자신이 주는 초월적인 일순간의 가르침.
지금의 공이수가 흉내 낼 수 없고 기억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차원의 문이 열린다.
공이수는 알 수 없는 전율에 몸을 떨며 차원의 문을 가볍게 뛰어넘는 김신화를 바라본다.
이 무대에서 [퇴장]하기 직전, 김신화는 등 뒤를 돌아보면서 싱긋 웃었다.
"선배님, 미래에서 만나자고."
공이수는 움찔 떨며 뒤로 물러섰다.
"싫어, 나를 아는 척도 하지 마. 너와 얽히고 싶지 않아."
"그래, 언젠가 선배님은 그런 식으로 나에게 처음으로 말할 거야."
가면은 싱긋 웃었다.
"선배님, 나는 김신화야."
"꺼져!"
하, 그리운 울림이라니까,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닫혀가는 차원문 사이에서 들려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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