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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라망

만날 수 없는


그 둘은 검은 구멍을 지나간다. 무엇을 그리워하고 무엇을 원하는 지, 이제 명확해질 것이다.
시간이 분리된 것인지 공간이 분리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종과 횡을 파악할 수도 없으니. 그러니 육신의 검도, 지혜로운 금속도, 시간의 마법사도, 공간의 방랑자도 그곳에선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해, 선배?”
“쓸데없는 소리”

나무에 기대어 있는 사랑스러운 후배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돌연 허공을 향해 뛰어들다 멀리 있는 곳에서 다시금 나오는 공이수. 그러곤 한참이나 시계 바깥쪽 메탈 링을 핑그르르 돌리더니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간다. 몇 초간 사라지나 했더니 몇십 미터나 떨어져 있는 나무 뒤에서 뛰쳐나오는 게 보이자, 한숨을 푹 쉴 수밖에 없었다.
‘진지한 사람을 놀리지 않으려곤 해도…. 뛰어다니는 게 마치 토끼를 연상하게 하네.’
김신화는 팔짱을 낀 채 그 장관을 방관한다. 지금 억지로 말리다가 한바탕 싸우지만 않으면 다행일 거란 생각과 함께 그냥 내버려두기로 한 것이다.
‘뭐든 직접 경험해보는 게 가장 좋은 거니까.’
그나저나 원래 회귀자들은 저렇게 괴팍한가? 기껏 생각해서 말해줬건만 결국 몸통을 부딪쳐봐야 깨닫는다니까.

‘저 선배는 좀 식히게 내버려두고. 이제 뭘 하지?’
유감스럽게도 김신화에겐 아직 귀환 집착증이 있다. 이 상황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페널티인 상황.
‘일단 임시방편이라도 취해야 되겠군.’
왼손 모양으로 의태한 촉수가 중지를 중심으로 부드럽게 갈라지더니 곧 나무가 가지를 치는 것처럼 길어지고 가늘어진다. 목표는 눈 안, 분홍빛 점액들은 부드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시신경 뭉치로 다가가 그 틈을 비집는다. 동시에 번쩍번쩍 튀는 스파크.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촉수들은 뇌의 여러 군데를 자극한다 윽, 생각보다 기분 나쁘지는 않은데, 뇌-에스테틱이 있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이곳저곳을 훑으며 적당한 신경세포 여럿을 자극하고 겸사겸사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도파민을 주입한다. 그러고 할 일을 마친 촉수는 다시금 부드럽게 돌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한 왼손으로 돌아갔다.

자, 이제부터 여긴 나의 집이다.
눈을 뜨니 어느새 내 앞에 있는 공이수. 그걸 빤히 쳐다보고 있었군, 부끄럽게.

“뭘 한 거야?”
“그저 여길 내 집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뿐이에요. 여기에 갇혀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착한 후배는 광기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스스로 목줄을 채운 거라고요”
“젠장, 그러다가 여기에서 나가기 싫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 말을 끝으로 공이수는 반대편으로 뛰었다, 다시 앞으로 튀어나왔다.
“아, 선배. 그런 경험 안 해보셨어요? 집에 있지만 집에 가고 싶다는 욕망. 굳이 따지자면 저에게 이 공간은 집이 맞지만, 사촌 동생들과 잔소리쟁이 고모들과 귀찮게 구는 삼촌이 있는 공간이에요.”

그러니 이 방법이 임시방편인 것이다. 김신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한 평안을 줄 수 있는 집을 원할 것이다.
“나갈 방법을 알아볼 테니까 선배는 여기 가만히 계세요. 여기선 공간 이동도, 시간 이동도 안 되니 괜한 체력 낭비하지 마시고. 나중에 필요할 때 부를 테니 그때까지 능력은 좀 아껴두시라고요.”

그러곤 김신화는 기대고 있는 나무 기둥을 따라 스르르 미끄러져 앉은 후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다. 그에 맞추어서 퍼져나가는 왼손의 촉수, 이번에는 황색망사점균과 같이 기분 나쁜 가느다란 촉수 가락으로 펼쳐지더니, 점차 범위를 넓혀 가늘고 굵은 실로 바닥을 덮는다. 초록색이던 잔디밭은 어느새 분홍색으로 물들여졌고, 김신화는 어느새 분홍 카펫 위에서 명상하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내 성미랑 맞지 않는데.”
계속해서 이 공간과 진을 빼던 공이수는 김신화의 말대로 지쳤는지 앉아 있는 후배를 보며 중얼거리다 시선을 옮겨 초콜릿이 흐르는 강을 보았다.
‘동화 테마인가? 그렇다고 치기엔 여긴 완전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아니잖아.’
이 공간은 초콜릿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황금빛 길이 놓여 있으며, 여러 버섯과 티파티 테이블이 차려져 있고, 말하는 장미 정원이 있다.
‘하다못해 동화가 아닌 것도 섞여 있군.’ 시계 위에 한 손을 올리는 공이수. 일반 사람처럼 보자면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의미. 나무 아래 집중하고 있는 후배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풀썩 누어서 하늘을 바라다보니 붉은 용이 떠돌아다닌다. 기묘한 광경에 비해 지나치게 평화로운 곳이다. ‘방랑이 막혔다라….’ 의도적으로 머문 적은 있어도 이렇게 단단한 느낌을 주는 곳에 갇히는 건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한참 하늘을 노려보다 지나치게 좋은 날씨와 따듯한 햇살, 살랑이는 바람결에 어느새 눈을 감는다.

*

그가 언제 잃었는지도 모른 정신을 되찾았을 때는 뾰족한 무언가로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찌르는 느낌을 받았을 때이다.
“김신화, 하지마.”
그래도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자, “젠장, 김신화. 일어났으니까 그만 찔러.”라고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그러나 일어나서 보인 건 재수 없는 가면이 아닌 평화로운 초록 잔디밭. 뭐야? 그는 그 따가움의 근원을 따라 시선을 옮겨서야 그 정체를 알았다. 처음엔 작은 쥐인가 했었지만, 그가 마주한 건 한 뼘에서 절반 정도 되는, 크기 말고는 모든 게 익숙한 단발머리 여성이었다.

“야, 너 뭐야?”
그는 대답을 종용하는 듯 한참 침묵을 유지하였지만, 상대가 계속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니 다시금 말을 잇는다.
“여긴 우리 구역이야. 분홍 점균이 우리 마을에 가까이 와서 원인을 찾으려고 하니 네가 길을 막고 있잖아.”
그러나 시계 머리는 질문과 전혀 아귀가 맞지 않는 답을 내놓는다.
“팀장님?”
“팀장? 누가 네 팀장이라는 거야?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길이나 비켜”

젠장. 아니아니, 공이수는 고개를 흔든다. 심연의 존재가 또 장난질을 친 건가?
“…. 댁 이름이 양서호 맞습니까?”
“뭐야.”
그러자 그 작은 사람은 자신보다 한참 큰 생물에게 바늘을 들고 위협한다.
“어디서 알았어?”

그러자 공이수는 양손을 들고 항복 의사를 취하며 자신에게 어떤 수상한 의도가 없음을 증명한다.
“일단…. 마을에 가서 설명하겠습니다. 점균이 문제라면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게 네놈 짓은 아니겠지?”
그는 자기 후배를 잠깐 돌아보다 말을 잇는다. 여기서 깨울 수도 없고, 내가 가는 게 맞겠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좋아, 그럼. 따라와.”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양서호. 그 스피드가 마치 도망치는 생쥐와 같아서 그 또한 조금 달려야만 했다. 마을 근처로 다가가자, 그 말 그대로 촉수는 마을을 둘러싸기 일보 직전이었고, 양서호는 그것을 높게 점프해서 피하더니 깨끗한 마을 한 가운데에 착지한다.

“여기야. 우리 마을이지.”
“하, 빠르시네요”
“별로? 잘 따라오던데 엄살은.”

그 말에 공이수는 크기가 변해도 성격은 그대로라며 한숨을 쉬었다. 마을 전반은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가로세로 2m쯤 되려나. 그에 비해 촉수는 제법 공격적으로 들어와 그 근방은 벌써 분홍빛으로 물들여있었다. 아마 마을 사람들이 힘써서 막은 덕분에 촉수가 마을을 덮치지 않은 거겠지. 이렇게 보니 위협적으로 보이긴 하는군. 그는 오른손을 들어 하얀 알갱이 한 줌을 만들더니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마을 근처에 두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을 애써 피하니, 양서호는 그들을 집 안으로 대피시켰다. 그리 넓지 않아서 마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금 결계가 쳐지게 되었다.
‘그 가면이라면 내가 만든 소금이라는 걸 알겠지.’
아마 이 공간의 모든 곳을 찾아본 후 정 방법이 없다면 여기를 침범하겠지만, 점균이 모든 걸 삼키기엔 이 공간은 제법 넓어 보이니 얼마 정도 막아주는 시늉을 할 시간은 있을 것이다.

“정말 이 소금이 효과가 있다고? 아무리 봐도 평범한 소금인데.”
양서호는 그 소금을 찍어서 먹어보곤,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그리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막아줄 겁니다. 그럼, 해결은 되었으니. 이제껏 있었던 일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어느 정도 의도가 담겨있는 질문. 공이수는 그가 진짜 양서호인지, 아니면 아예 독립된 개체인지를 판단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양서호는 콧방귀를 뀌곤 겨우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이 웃는다.

“여긴 내 고향이야. 우린 이 언덕에서 농사하고, 새나 쥐가 자주 침범해서 이 마을의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훈련을 하며 마을을 지켜. 사담이지만, 그들 중에는 내가 강하고. (이때는 꽤 자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엄지로 자신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번 사건도 언제나 그랬듯 마을 사람끼리 무찌르고 있었는데 얘는 도무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내가 원인을 찾으러 온 거야.”
그러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의 밭인지, 여기에선 무엇을 기르는지, 어떤 동물은 밥을 많이 먹는지, 이 시기에 파종을 잘해야 많이 거둘 수 있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다. 양서호의 머릿결은 쉬지 않고 나풀거리고, 따뜻한 날씨에 상쾌한 바람은 계속 불어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준다.

‘이 양서호는 완전히 다른 양서호인가보군.’
그 평화로운 광경에 걸맞지 않게 공이수는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부모님은 잘 계십니까?”
그 말에 양서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공이수를 흘끗 쳐다본다.
“이상한 걸 물어보네. 내가 부모가 있을 나이로 보이나? 이미 돌아가셨지.”
그러곤 다시 멀리 시선을 돌려 마을을 쳐다본다.
“내가 가족을 꾸리는 걸 못 보고 가셔서 걱정이 많으셨지만. 좋은 분이셨어.”

그 말을 하는 양서호의 말투에는 어떤 슬픔보다는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잠잠한 감정이 묻어났다. 어떤 격동적인 감정들이 휘몰아치기보다는 사실을 전하는 말투. 그 광경에 공이수는 그저 그렇군요.하고는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이번엔 양서호가 입을 연다. “네가 여기에 있으면 마을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어때? 저 침입자가 언제 다시 이 마을을 공격할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너는 덩치가 있으니 다른 동물들로부터 잘 보호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대신 의식주는 우리가 마련해주지. 물론 덩치가 크니 먹을 양은 많겠지만 여기는 식량이 풍족하니 괜찮을 거야.”
공이수는 소인들에게 기댈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는 새삼스럽게 양서호를 바라다보며 한참 말이 없어지다, 양서호가 싫으면 됐어라고 하기 전에 입을 연다.

“...제가 여기 다시 찾아온다면, 그때 환영해 주십시오.”
“곧 떠날 사람처럼 구는군. 뭐, 상관없어.”

양서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였다. 곧 공이수도 양서호를 그만 쳐다보고 마을 쪽을 쳐다본다. 지극히도 평화로운 광경. 위기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되었는지 마을 사람들은 슬금슬금 밖으로 나오고 있었고, 어떤 아이들은 서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어른들은 쭈뼛거리더니 곧 자신의 밭에 들어가 잡초들을 뽑기 시작했다. 그 모든 난리통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엔 평화로움이 깃들어있었고, 어떤 여유가 느껴졌다.

‘어쩌면...여기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 오래 말고, 한 열흘하고도 삼일 정도. 만약 후배가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말이지.’
그런 감상을 남기며 그 마을을 쳐다보며 어떤 회환에 잠겨있을 무렵, 소금을 넘지 않고 천천히 움직이던 분홍 촉수가 불현듯 꿈틀거리다 돌연 공이수를 가로챈다. 양서호의 눈빛에 깃드는 당혹스러움. 그렇게 다시금 공이수는 깊은 구덩이로 빨려 들어간다.

“헉!”
그러자 보인 건 재수 없는 얼굴…. 아니 가면.
“선배. 눈 떴어?”
그는 천천히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킨다.
“젠장, 개꿈이었군.”
“아, 그건 꿈이 아니야 내가 꿈 이야기처럼 바꾼 거지.”
나풀나풀, 너울너울. 부채를 가리고 웃는 김신화.
“거긴 친근감을 느껴야 나올 수 있는 공간이었거든. 선배가 일을 잘해줘서 나올 수 있었지.”

질 나쁜 공간이네. 그렇게 중얼거리다 김신화에게 대수롭지 않은 듯 물어본다.
“하나만 더 물어보지. 그 공간은 진짜인가?”
그 말에 김신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답한다.
“선배, 답지 않은 질문을 하네. 그 공간이 진짜든 가짜이든 우리에겐 관계가 없어. 어차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공간이거든.”
이미 친근감을 느껴버렸으니까.
공이수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그렇군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움직였다.

*

그는 언제나 그랬듯 양서호에 대한 꿈을 꾸었다.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양서호, 이제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할 양서호와 처참한 꼴로 죽어버린 양서호, 누군가를 구한 양서호와 누군가를 구하지 못한 양서호. 그는 그 뻔한 꿈들 중에 조그마하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사는 양서호가 한 줌 추가되었을 뿐, 그가 살던 세계에 그 이상의 영향을 끼치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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